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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보호받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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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회계약설이니 하는 무슨 거창한 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동서고금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왕조시대건 21세기건,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제대로 된 나라라면 제 백성 보호에 최선을 다한다.

그 중에도 자국민 보호에 특히 철저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1976년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작전은 유명하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아프리카 우간다까지 무려 4000여㎞를 비밀리에 날아가 인질로 잡힌 자국민을 구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국민 한명을 구출하기 위해 적군 포로 100명을 풀어준다. 실제로 올 1월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민 한명과 병사 유해 3구를 넘겨받고 팔레스타인 포로 등 450여명을 석방했다. 이처럼 나라가 국민을 말 그대로 일당백(一當百)으로 대접하니 국민도 일당백의 정신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중동전이 일어나면 전 세계 이스라엘 청년들이 앞다퉈 귀국한다는 신화는 거저 생겨난 게 아니다.

좀 유별난 면이 있지만 미국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인이 인질로 잡히면 지구 끝까지 달려가 구해낸다. 95년 보스니아 내전 때 미군 조종사가 미사일에 피격돼 적지에 떨어지자 미군은 특공대를 보내 6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에너미 라인스'는 이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산 사람뿐이 아니다. 미국은 50여년 전 한국전 때 전사한 미군 병사의 유해를 지금도 발굴해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다.

우리도 옛날엔 그랬다. 꼭 400년 전인 1604년 사명대사는 바다 건너 일본에 갔다. 7년간에 걸친 왜란으로 소원해진 양국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 측과의 담판에 성공한 사명대사는 이듬해 3000여명의 피랍자를 데려왔다.

그러나 요즘 우리 정부가 국민 대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한심하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이번 김선일씨 사건만이 아니다. 외교통상부의 무능과 무사안일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제 나라 국민이 외국에서 감옥에 가건, 사형을 당하건 나몰라라하는 게 이 나라 외교관들이다. 천신만고 끝에 탈북한 국군포로에게 "당신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문전박대한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외교관인가. 외국 여행 중 소매치기라도 당해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해 보라. 십중팔구 "그건 우리 소관사항이 아니다"라는 답변을 들을 것이다. 그러고도 국민 세금으로 봉급을 타는 게 부끄럽지 않은가.

물론 외교관들도 할 말은 있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인원은 턱없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국민을 일일이 챙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 특파원으로 여러 해 근무하면서 봐 왔지만 음지에서 열심히 일하는 외교관들도 많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외교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이미 우리 군대가 파견돼 있고 추가로 3000명을 파병하는 지역에 현지어 구사 인력이 단 한명이라니 말이 되는가. 이건 단순한 인사 잘못이 아니라 직무유기에 가깝다.

이번 일을 계기로 외교부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단순히 장.차관이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당히 때가 되면 공사.대사를 거쳐 정년퇴임하는 철밥통 조직으론 백년하청이다. 외부 전문인력을 충원해서라도 조직을 과감히 쇄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같은 일은 언제라도 재발한다. 이래가지고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도 일류국가 대접을 못 받는다.

유재식 문화.스포츠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