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시시각각

억울해도 미련을 버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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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사실 미국발 금융위기만 아니었어도 한국 경제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행들이 급작스레 외환 부족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업들이 부도 위험에 내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취업난이 이토록 극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영업자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기업 개혁이 지금처럼 유야무야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다 미국이 금융을 망친 데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미국의 금융위기가 표면화되기 전만 해도 한국 경제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사실 국내 은행들은 미국의 거덜 난 금융회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실했다. 국내 기업들의 재무구조도 일부 건설·조선·해운업종을 제외하곤 꽤나 튼실한 편이다. 그런데 미국이 난장판을 쳐놓는 바람에 멀쩡한 국내 은행과 기업들까지 구조조정의 압력에 시달리게 됐다. 여기다 우리 기업과 은행의 잘못이 없는데도 외국의 언론과 신용평가사들은 공공연히 부실화의 가능성을 들먹이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정부의 대응이 묘하다. 한편으론 칼 같은 구조조정을 다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경기 부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입으로는 부실 기업을 하루빨리 솎아내야 신용경색이 풀린다면서 손으로는 기업 대출의 만기를 일괄 연장해 모든 기업을 살려보겠다고 안달이다. 한편으론 우리 금융회사들의 건전성에 별 문제가 없다면서 다른 한편으론 부실화에 대비해 미리 공적 자금을 받으라고 엄포를 놓는다. 죽이겠다는 건지 살리겠다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이러니 헷갈릴 수밖에.

이런 정부의 엇갈린 신호에 은행과 기업들은 늘어나는 게 눈치뿐이다. 아직은 부도가 난 것도 아니고 자본을 다 까먹은 것도 아니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연명할 길을 찾아 백방으로 헤맨다. 우량 기업은 물론이고 껍데기뿐인 좀비 기업까지 구조조정의 무딘 칼날을 피해 납작 엎드렸다. 여기에다 일자리 마련이 급선무라며 막대한 자금 지원까지 해줄 판이니 어느 기업, 어떤 금융회사가 자진해 날 죽여 달라고 목을 디밀겠는가.

정부의 혼란스러운 대응에는 억울함과 미련이 잔뜩 배어 있다. 작금의 위기가 MB 정부 탓이 아니라는 억울함과 잘하면 성장 신화를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다. 여기에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비겁한 보신주의도 빌미가 되고 있다. 한편으론 구조조정의 고통은 한껏 미루면서, 다른 한편으론 돈을 마구 퍼부어 경기 침체를 막겠다는 미봉책이다. MB 정부가 선진국들도 다 그러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는 위안을 가질 법하다.

그러나 이런 감성적 자기 위안만으로는 결코 경제를 살릴 수 없다. 뜨뜻미지근한 미봉책으론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선진국들도 그런 식으론 위기를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당장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 안이한 오바마 정부의 위기 대응책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 않는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과 단호한 대책이 필요한 때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