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청론]부실기업 인수·합병 활성화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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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근 동남아국가의 통화폭락사태에 뒤이은 경제혼란을 보면 경제위기는 시스템 실패가 누적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위기를 예고하는 갖가지 징후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 위기가 찾아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에 비해 건전한 경제구조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싱가포르.대만.홍콩등도 통화폭락사태에 직면한 것을 보면 위기는 다분히 남미에서처럼 '전염' 되는 특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분명히 전염가능권에 있으며, 자칫 잘못 대응하면 심각한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한다.

외국인의 지속적인 주식매도, 주식시장의 급속한 하락, 원화의 평가절하 압력, 대규모 기업집단의 부도행진, 심화되는 금융권 부실, 정부의 속수무책등 지난 몇달간 계속된 악순환은 좋지 않은 위기의 징조였다.

한보부도이후 지난 9개월동안 외국인들은 우리 경제의 시스템 실패를 파악하게 되었다.

부실기업이 인수합병시장에서 전혀 처리되지 못하고 바로 금융권부실로 전가되는 여건에서는 금융권의 부실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기아그룹의 금융부채만으로도 상당수 종금사들이 자기자본을 전액 잠식당하는 규모가 된다.

금융권이 부실하면 웬만한 기업은 자금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산하는 악순환이 불가피해진다.

부실기업의 우호적 인수합병이라는 최선의 처리방안이 각종 정부규제로 불가능했던 것이 금융권 부실을 급속도로 악화시키고, 우리경제와 정부의 대처능력에 대한 해외신인도를 크게 저하시켜온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기아문제를 법정관리로 풀어가려는 것은 기업부실이 금융부실로 전가되지 않도록하는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로 차선의 대책은 된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법정관리후 공기업화하는 것은 궁극적 해결책이 못된다.

95년에 통화위기를 겪은 멕시코 정부는 무려 4백50억달러 (약41조원)에 달하는 부실채권을 금융권으로부터 떠안고 아직도 처리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4천개가 넘는 은행.항공사.호텔.음식료회사등 부실기업의 실질적 대주주가 된 셈이다.

결국 부실기업들을 외국기업에 싼값으로 팔아넘기지 못할 경우 수년내에 정부적자, 무역적자, 인플레가 악화되는 과정을 거쳐 다시 통화폭락사태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태국등 동남아국가들도 유사한 경로를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가 현재의 작은 위기를 신속히 해결하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면 자칫큰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 일부 외국인 투자가들의 견해이다.

다음 정권까지의 4개월은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로서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자발적인 인수합병이 활성화되도록 제도정비가 이뤄져야 비로소 추가적인 기업부도 행진이 멈출 수 있다.

기아자동차와 관련해서도 현대.대우.삼성등이 모두 공정한 인수경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점법.공정거래법.세법등을 정비해야할 것이다.

박우규 <선경경제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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