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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 열며]매미선생님과 제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날씨가 너무 더워 어린이는 부채를 들고 동네 어귀에 있는 큰 느티나무를 찾아갔다.

동네 어른 두분이 멍석 위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매미들은 "장이야!" 하는 소리를 지르면 일단 잠시 생각하듯 조용하다가 또 맴맴맴 하는 것이었다.

"멍이야!" 해도 매미들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맴맴맴 했다.

어린이는 멍석 한 귀퉁이에 엉덩이만 올리고 다리는 엉성한 풀바닥 위에 편안히 젖혀 놓았다.

점점 매미소리가 커지는 듯했다.

여러 매미들의 열띤 합창에 어린이는 점점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못알아 듣겠어. 넌 알겠니?" 옆의 매미도 "사람들은 다 그러더라. 워낙 모를 소리만 하는 걸. 신경쓰지 말고 우리 다시 노래나 부르자. 맴맴맴 - ." 나무와 더불어 사는 매미들. 애벌레 때는 나무 뿌리 밑에서 미생물들을 먹으며 6, 7년을 침묵으로 도 닦다가 세상에 태어나 나무의 수액으로만 사는 빙산의 일각 같은 매미들의 생활, 그러나 겨우 2~3주 살다가 영영 되돌아올 수 없는 몸으로 가버리는 매미들이다.

장시간의 침묵으로 고요히 눈감고 생활하던 매미들이 짧은 여름에 한번 인간을 본다.

그 매미들 틈에 어린이는 작은 마음이 돼 흩날리기 시작했다.

둥그런 광각의 눈으로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두툼한 눈들이 거대하게 보였다.

어린이의 작은 마음은 듬직한 매미들의 마음과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미들은 맴맴맴 하면서 종일 무엇을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궁금했었다.

이제야 매미들의 소리가 들렸다.

"넌,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니?" "뻔하지 뭐. 장이야! 하고 음 - 하면, 멍이야! 하고 어흠! - 하는게 사람들이지 뭐. " "그래 맞아. 너나 나나 비슷한 생각이야. 내 생각엔 그저 가만히 장기판만 내려 보다가 겁주거나 빈정대는 말 한마디씩 내뱉는게 사람들인 것 같아. " "그리고 말야, 사람들은 나무 그늘을 좋아하는 동물이기도 한가봐. 이 느티나무 밑에는 맨날 사람들이 있거든. " "그런데 말야, 그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들이 잘났다면서 남의 흉을 보는게 대부분이더라구. "

어린이는 어른들의 세상을 자신도 생각해 보았다.

미안해 더 이상 매미들 곁에 있을 수 없어 돌아가서 정리하기로 했다.

장이야 하면 흠 하고 멍이야 하면 음 한다는 말이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장기판만 내려다 본다는 말이 의미가 있었다.

특히 맞는 말은, 말만 하면 남의 흉을 보는게 다반사라는 점 등. 그리고 나무 그늘 같은 그 누구의 그늘 밑을 좋아한다는 점들. 어린이는 매미들이 참 훌륭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린이는 생각 한가지를 더 보탰다.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아온 나무 앞에서도 큰 소리 치는 동물들이 인간이라는 점이기도 한 것을 알았다.

불과 2~3주만 살면서 본 인간에 대한 정의인데도 어린이는 자기네 학교 선생님의 말씀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겼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는 부스스 정신이 들어 노인들의 장기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른은 이렇게 소리쳤다.

"너 훈수 들지 마! 내 이번엔 이 놈을 묵사발 만들어 주고 말거야!" 하는 것이었다.

그 큰 소리가 한평생 이기며 살아야 한다는 비참한 이 세상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이는 왠지 슬퍼지기 시작했다.

나도 크면 저래야 하나 하는 답답한 통증 (痛症) 이 몰려왔다.

그래도 6, 7년 땅속의 도를 닦은 매미들이 어린이를 위로해 주는 바람에 어린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날 수 있었다.

"맴맴맴매앰" 도사님들의 안녕 소리였다.

어린이는 투표가 50여일 남았다는 지금 다시 어른들의 세상을 생각해 본다.

대선 후보들은 장기를 두고 있나봐! 나무 그늘은 무엇일까. 국민? 나라? 사람사는 동네는 별로 자세히 보지 않고 왜 작전판만 죽어라 들여다 보며 큰 소리들만 할까. 큰 나무 그늘에서 나무를 사랑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이기겠다고 야단만 치니…대통령은 크고 넓게 통하는 사람이라던데….

이기정 <답십리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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