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특집]제작현실…흥행만 쫓다 '코미디'가 되어버린 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영화기획.홍보 일을 하는 X (30) 는 중학교때부터 영화광이었다.

비디오로 홍콩 TV액션영화까지 다 섭렵했다.

대학 전공도 영화쪽으로 선택했다.

영화지식이나 이론면에서 또래 영화광들에게 추앙받는 실력자였다.

그는 감독이 되려면 유명감독의 연출부로 들어가 몇년 고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계 사람들과 광범위하게 교분을 쌓으면서 현장에 대해 공부해 나가고 미국과 홍콩등에서 발전된 노하우도 배우고 싶었다.

그는 독립영화니 예술영화보다 '서편제' 처럼 대중들이 인정하고 성공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예전부터 습작해오던 시나리오를 심혈을 기울여 완성해나갔다.

X는 자신이 만든 기획안과 시나리오를 들고 여러 영화사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너무 예술을 한다” 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그보다는 “신세대 감각의 코미디” 쪽으로 시나리오를 다시 써보라는 충고나 받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유학중이라던 Y (32)가 갑자기 감독데뷔 하게 됐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미국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길래. 제작자와 무슨 연줄이 닿았길래 10억이 넘는 거금을 선뜻 내놓았을까. 외국 영화학교는 그렇게 훌륭하단 말인가.”

그는 Y처럼 뒤늦게라도 유학을 생각해보았으나 돈문제 등으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을 향한 희망을 접고 돈줄 등 제작시스팀이나 체험하기 위해 일단 기획홍보사에서 뛰고 있다.

Y는 외국에서 어렵사리 학부를 졸업하고 영화석사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낭보가 들려왔다.

유학 선배가 한국의 제작자를 소개시켜준 것이다.

게다가 쓸 만한 시나리오가 나왔다는 것이다.

원래 영화감독이 꿈이었는데 굳이 석사과정을 마칠 필요가 없었다.

제안된 작품 내용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

어려서부터 필름누아르나 비극에 관심이 있었는데 부담없이 즐기자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속으로 조금 캥겼지만 “꿈에 그리던 영화감독이 된다는 데” 마다할 것도 없었다.

Y는 데뷔작 성격이야 어떻든 상업적으로 성공만 한다면 그 다음엔 나름대로 작품세계를 펼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Y는 관객이 20만이 넘는 성공작을 내놓았다.

두번째 작품 제안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거의 1백% 로맨틱 코미디였다.

주변에선 “로맨틱 코미디의 귀재가 나타났다” 는 말까지 나돌았다.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코미디 한 작품만 더 해 볼까. 얼핏 조감독.작가로 활동하며 충무로에서도 누구나 알아주던 Z (34)가 생각났다.

Z는 짜임새 있는 멜로물로 지난해부터 데뷔한다고 소문이 났으나 여러번 제작자와 마찰을 일으켜 아직 작품이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Z는 영화감독에 꿈을 두고 직장을 박차고 충무로 최대의 영화사 연출부로 들어갔다.

오랜 현장경험이 있는 데뷔 감독의 시나리오도 맡아 첫 작품부터 국내 영화제 상을 휩쓰는 등 작가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Z는 창작시나리오로 영화제작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대기업에서 돈을 끌어대는 영화사들은 한결같이 창작 시나리오보다 자신들이 보유한 프로듀서가 짠 기획안을 가지고 해보라는 것이다.

'영화감독이 되고싶은 마음에' 제시된 기획안을 연구해 보았다.

얼핏보면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되고 흥행도 충분히 점쳐졌다.

그러나 도저히 마음이 쏠리지 않았다.

그런 작품은 다른 감독지망생도 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제작부 연출부 진용을 짜고 조명.음악.홍보쪽도 갖추었지만 결정적으로 제작비를 대는 대기업이나 창업투자사쪽에서 수용을 하지 않았다.

각본이 신파조라는 것이다.

신세대 감각을 최대한 넣으면서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또 스타를 기용하라고 종용해 왔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스케줄이 맞아 떨어진 배우 K가 캐스팅됐다.

그러나 제작발표회를 눈앞에 두고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제목의 다른 작품이 이미 크랭크인 됐다는 이유로 계획은 엎어졌다.

Z는 외국의 영화학교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뒤지기 시작했다.

채규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