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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녀, 춤추지 않고 춤을 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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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쥘리에트 비노슈는 춤추지 않았다. 단지 말을 하고, 말이 나오는 데로 몸을 움직였다. 근데 그게 또 춤이었다. 이 무슨 모순적 표현이란 말인가. 그게 비노슈였다. 춤이 아니면서 춤이 되고, 연기를 하면서 춤을 만들어내는 것. 오랜 세월 ‘무용’에 덧씌워진 고정관념을 비노슈는 훌쩍 날려버렸다.

19일부터 사흘간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내 안에서(in-i)’는 비노슈의 춤세계를 확실히 보여준 무대였다. 그건 어쩌면 무용 바깥의 예술인이 무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비노슈의 춤이 궁금했다. 그가 얼마나 다리를 올릴지, 허리가 어떻게 돌아갈지 등. 그러나 비노슈의 대답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사실 작품은 단출했다. 여인은 운명적 사랑을 기다리고, 남자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호기심을 느낀 여성이 남자에게 다가가면서 극은 얼핏 사랑의 애틋함이 충만할 듯 보인다. 그러나 사랑이 언제 아름답기만 했던가. 더러워진 변기는 사랑의 누추함을 그대로 분출한다. 너무나 익숙한 남녀 관계 아니던가. 그 안에서 비노슈는 꿈틀댔다. 춤을 잘 추었다는 게 아니다. 어설펐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잘 추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물 흐르듯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리고 진솔했다. 꾹꾹 눌러놓은 감정의 골을 한올한올 풀어낼때의 강렬함이란!

따지고 보면 이런 시도는 무용계 내부에서도 없었던 게 아니다. 1970년대부터 수많은 무용가들이 춤에 있어서의 연극성을 캐내기 위해, 피나 바우슈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댄스시어터(dance theater)’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 두 장르간의 혼합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춤과 연극의 경계를 단순히 하이픈 하나로 연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장르간 혼합이란 명분에 휩싸여 그 안의 더 근본적인 ‘몸’과 ‘움직임’엔 혹시 소홀하지 않았을까.

비노슈의 춤은 바로 ‘무용’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었다. 높이 뛰는 것만이, 빨리 회전하는 것만이 무용이 아니며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내면을 천착하는 게 때론 더 무용다울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언젠가부터 무용가들의 전유물로만 전락했던 무용을 누구나 자신에게 솔직하면 아름다운 움직임이 나올 수 있음을, 허공을 떠다니던 무용을 땅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비노슈는 안내했다. 그래서 고마웠다.

장인주 무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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