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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가는 金씨 피랍 의혹 일파만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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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초 AP 텔레비전 뉴스(APTN)로 배달된 이라크에서 피랍된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나오는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 [MBC TV촬영] (서울=연합뉴스)

김선일씨 납치와 살해 이면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다.

가나무역의 사장이 김씨가 납치된 후 20여일 동안 당국에 보고하지 않는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정부가 그 기간동안 많지도 않은 이라크 교민의 실종사실을 몰랐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라크 테러범들이 당초 파병저지 목적이 아닌 돈을 위해 김씨를 납치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여기에 24일에는 미국 AP통신의 텔레비젼 뉴스인 APTN이 김선일씨가 이라크 테러 세력에 피랍돼 진술하는 비디오테이프를 6월초 배달 받고 납치 여부를 외교통상부에 문의했으나, 외교부는 '피랍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외교부는 자국민의 납치와 관련된 정보를 받고도 이를 묵살한 셈이 된다. 사실여부에 따라 정부가 져야할 책임은 적지 않아 보인다.

납치 은폐 의혹=AP 통신은 23일(현지시간) 바그다드발 기사를 통해 "6월초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바그다드 APTN 사무실로 김선일씨의 모습이 담겨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았다"며 "6월 첫째주에 김씨에 대해 한국 외교부에 문의를 했으나 외교부로부터 '한국인이 납치됐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는 정부가 단순 직무유기가 아니라, 당시 반대여론이 거세던 추가파병 강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김씨 피랍을 숨긴 게 아니냐는 '은폐 의혹'에 힘을 실어 줄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동안 김씨 피랍 사실은 김씨가 5월31일 납치 이후 6월21일 새벽에 카타르 대사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서야 처음 인지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김씨 피랍 직후에 김씨 테이프를 입수한 외국 언론사로부터 사실 여부를 질의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은폐 내지는 직무 유기'로 밖에 볼 수 없다.정부는 그동안 "김선일씨는 이라크 교민 명단에 등록돼 있었다"고 누차 밝혀왔다.

특히 APTN이 김씨 피랍 사실여부를 확인한 6월초는 미군의 팔루자 학살과 이라크포로 학대로 반미여론이 급등하고 국내에선 파병반대 여론이 고조되는 민감한 시점이었다는 대목도 은폐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국회 등에서 청문회 또는 국정조사가 필요성도 나오고 있다.

만약 이같은 의혹이 사실로 들어날 경우 정부의 도덕성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편 외교통상부는 24일 AP통신 보도 등 의혹이 커지자 뒤늦게 주이라크 한국대사관 등에서 피랍 사실을 확인조차 하지 못한 데 대해 자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외교부는 "김천호 사장은 김씨가 피랍된 날짜인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20일까지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을 4차례 방문해 신변안전 유의와 관련한 독려를 받았으나 피랍된 김씨의 상황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한 바가 없었다"며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사장 진술 의혹=현재까지 김천호 사장의 진술은 의혹 투성이다.

테러범들의 명확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김씨 납치와 살해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김 사장은 김씨가 납치된 지난달 31일부터 피랍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이달 20일까지 4차례에 걸쳐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을 방문했으나 한 번도 억류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게 최대 의문점이다.

그는 이달 11일부터 무장단체 고위층과 잘 알고 있는 현지인 변호사를 내세워 인질범들과 6일간 접촉, 곧 풀려날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변호사를 통한 협상에서 테러단체가 석방조건으로 내세운 요구를 수용할 의향을 전달했고 그 결과 석방 약속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는 서희.제마 부대의 철수와 한국군 추가 파병 철회는 납치 원인이 아닐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 정부가 결정해야 할 파병 문제를 김 사장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데다 그 때까지 피랍 사실을 주 이라크 한국대사관에 일절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달 18일에는 현지 변호사를 통해 테러범들과 접촉했을 때 "김선일씨 억류사실을 대사관이나 경찰에 알리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는 진술을 했다.파병문제는 그 때까지 거론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하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김 사장이 자신의 사업이 위축될지 모른다는 판단을 하고 의도적으로 납치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정부에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마무리하려 했다가 한국 정부가 파병을 결정하면서 김씨의 피랍의 원인이 테러범들에게 '파병 철회'라는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김 사장이 대사관에서 행한 진술에서 피랍사건이 발생한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21일까지 행적을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으나 인질범들이 어떤 요구조건을 내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있는 것도 의혹을 부채질하는 부분이다.

결국 김 사장의 지금까지 진술이 사실이라면 인질범들은 20일 이전까지 가나무역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만족할 만한 행동이 뒤따르지 않자 살해 명분을 찾기 위해 파병문제를 뒤늦게 제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향후 외교부의 진상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디지털 뉴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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