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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 삼킨 글로벌 금융위기로 1년 새 15조원 날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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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24면

미국 억만장자 커크 커코리언(92·사진)은 17일 오후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 집무실 안을 맴돌았다. 은행나무로 만든 현대식 책장과 책상 사이를 초조하게 오갔다.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그 순간 그가 소유한 카지노·호텔업체인 MGM미라지의 채무조정 협상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운데 손가락을 굽혀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순간 전화 벨이 울렸다. 비서를 거치지 않은 직통 전화였다. MGM미라지 최고경영자(CEO)인 제임스 머린의 전화가 분명했다. 두 번째 벨이 울리기 시작한 찰나 커코리언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해냈습니다(We made it)!”라는 말이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도이체방크 등 채권 금융회사와 벌인 채무 재조정 협상이 타결됐다는 것이다. 커코리언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美 ‘카지노 황제’ 커크 커코리언의 몰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빈손으로 출발해 수십억 달러 재산을 보유하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였다. 하지만 그날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겨운 하루인 듯했다.”(라스베이거스 리뷰 18일자)

채무 재조정은 숨막히는 협상이었다. 경제위기로 사람들이 카지노 여행을 피하면서 182억 달러(약 26조원)의 부채는 거대한 바윗덩이처럼 MGM미라지를 짓눌렀다. 이자로 매달 약 1억 달러를 내야 했다. 경제위기 전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유럽 지역뿐 아니라 중국·인도·러시아·브라질 등 신흥국에서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미국·유럽 쪽 사람들보다 손이 컸다. 뭉칫돈을 걸고 카지노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신흥국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카지노가 부족해지자 커코리언이 은행 빚을 끌어다 공격적으로 카지노를 늘렸다.”(미국 시장조사기관 IBIS월드 보고서)

사재(私財) 줄고 회사는 위기
그러나 지난해 9월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모든 상황을 뒤흔들어 놓았다. 세계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유동성(자금)이 줄어드는 단계를 지나 아예 마르기 시작했다. MGM미라지가 부담해야 할 이자가 크게 늘어났다. 카지노와 호텔 손님은 줄어들었다. 지난해 4분기 매출은 16억 달러에 그쳤다. 전분기보다 15.7% 줄어든 것이다. 분기 적자만 11억 달러에 달했다.

지난달 말 MGM미라지는 긴급 이사회를 열었다. CEO 머린이 채권단과 협상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길게 논의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상황을 알고 있었다. 커코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린은 서둘러 채권 금융회사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원리금 상환을 얼마간 미뤄 주면 회사 자산을 처분해 원금을 줄이겠다고 제안했다.

채권단과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머린이 얻어낸 시간은 두 달. MGM미라지는 5월 17일까지 라스베이거스나 디트로이트 등에 보유한 호텔이나 카지노를 팔아 원금을 줄여야 한다.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최대 주주인 커코리언이 개인 돈을 추가로 투자해 살려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MGM미라지는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MGM미라지의 자산 매각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 회사는 끝내 파산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커코리언의 자금 사정도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한 해 동안에만 110억 달러(약 15조원)를 날렸다. 포브스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년 새 160억 달러에서 50억 달러로 급감했다. 3분의 1 토막이 난 것이다. 그가 내심 경쟁자로 여기는 워런 버핏의 재산은 40.3%(620억 달러→370억 달러) 줄어드는 데 그쳤다. 포브스는 “커코리언은 세계 400대 부자 가운데 지난해 재산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사람의 하나”라고 보도했다.

라스베이거스 역사가인 K J 에번스는 “이번 위기가 커코리언 개인적으론 두 번째”라고 말했다. 첫 번째 위기는 1980년 호텔 화재였다. 그의 MGM그랜드 호텔에 불이 나 모두 87명이 숨졌다. 보험금을 받아 첫 번째 위기는 이겨냈다. 행운도 따라 주었다. 마침 일본 관광객들이 자산 거품을 만끽하며 라스베이거스를 찾았다. 그들은 패전국 콤플렉스를 카지노 판에서 풀려는 듯 당시 미국인이 엄두도 내지 못하던 뭉칫돈을 걸고 게임을 즐겼다. 커코리언은 이런 호황을 이용해 불 난 호텔을 86년 처분해 약 6억 달러를 손에 쥐었다.

전성기 땐 크라이슬러 인수도 추진
커코리언이 왜 이런 궁지에 몰렸을까? 2006년 이후 판단 착오가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첫째 판단 착오는 미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베팅이었다. 그는 2006년 이후 GM과 크라이슬러·포드에 눈독을 들였다. 지분을 사들인 뒤 인수합병(M&A) 등을 유도해 시세차익을 챙기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포드 투자는 그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혔다. 10억 달러 정도를 투자해 7억 달러 정도를 날린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10억 달러를 들여 포드 지분 6% 정도를 확보했다. GM이나 크라이슬러와 견줘 포드는 상대적으로 실적과 재무 상태가 좋았다. 자동차 산업 침체 때문에 M&A가 벌어지면 포드가 중심 축이 될 수 있다고 커코리언은 판단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M&A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동차 판매가 급감하면서 주가가 곤두박질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지분을 팔기 시작한 커코리언은 12월에 모두 털어 버렸다.

자동차에 대한 커코리언의 집착은 95년 처음 나타났다. 그해 그는 크라이슬러 주식을 매집하며 인수를 시도했다. 크라이슬러 경영진은 그의 주식 매집을 적대적 M&A 시도로 보고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결국 그의 인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크라이슬러는 독일 자동차그룹 다임러에 넘어갔다.

그는 2007년 다시 크라이슬러에 눈독을 들였다. 다임러가 크라이슬러를 분리·매각하려 하자 45억8000만 달러를 제시하며 인수 뜻을 밝혔다. 하지만 다임러는 사모펀드 세버러스·블랙스톤 컨소시엄에 크라이슬러 지분을 넘겨줬다. 커코리언은 다시 한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의 애널리스트인 에프레임 레비가 “자동차에 대한 그의 베팅은 투자라기보다 스토킹에 가깝다”고 촌평할 정도였다.

그는 자동차 회사에 대한 투자에서 돈은 돈대로 잃고 웃음거리만 됐다.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처럼 야수적 본능과 지능적인 플레이를 보여 주지 못했다. 아이칸은 지분을 보유한 회사에 대한 M&A를 주선하거나 추진하다 불리해지면 시세차익이라도 올리고 물러났다. 그렇다고 커코리언이 버핏처럼 명분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버핏은 위기의 순간 “미국을 믿는다”며 위기에 빠진 금융회사에 투자했다. 막대한 손해를 봤지만 금융 시스템 안정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커코리언은 미 자동차 산업이 어려운 때 지분을 모두 처분해 버렸다.

잇따른 판단 착오를 인정한 듯 그는 지난해 10월 포드 지분을 팔기 시작하면서 “라스베이거스 비즈니스(카지노)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카지노 산업이 불경기에 강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그는 중국·인도 등 브릭스 지역 여행객들을 믿었다. 선진국 손님들이 줄어들더라도 브릭스 지역의 신흥 부자들이 카지노를 즐기면 충분히 위기를 타고 넘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판단은 빗나갔다. 그의 생각보다 금융위기의 강도는 훨씬 셌다. 브릭스의 누보리치(신흥 부호)들의 씀씀이까지 줄여 놓았다. 미국 복권협회 대변인인 자크 코는 최근 워싱턴 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멕시코 사태나 아시아 금융위기 때는 그 지역에서 오는 고객만 줄었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카지노 여행객이 줄어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그가 80년 호텔 화재처럼 이번 위기도 이겨낼 수 있을까. 이번은 다르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80년대 후반처럼 자산 거품을 등에 업고 카지노를 즐길 만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도 그의 편이 아니다. 라스베이거스 역사가인 에번스는 “그가 너무 늙었다”고 지적했다. 아흔이 넘은 그가 80년 화재 때처럼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이번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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