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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경영, 권한 위임이 두 집 살림 비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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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위기를 반영하는 새로운 인사 트렌드일까. 최근 재계에 두 개 이상 계열사 대표이사를 한꺼번에 맡은 최고경영자(CEO)가 자주 등장한다. 혹은 대기업 대표이사이면서 핵심 사업 부문장까지 총괄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인사 배경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위기관리 실력을 인정받은 ‘검증된 CEO’가 대부분이다. ‘경영 고수’도 “기업 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는 요즈음, 이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까.

지난달 초 국내 최대 시멘트 회사인 쌍용양회의 대표에 오른 김용식(55) 사장은 관계사인 쌍용해운의 대표도 동시에 맡았다. 쌍용양회 기획본부장(상무)에서 전무·부사장을 건너뛰어 사장에 발탁된 그는 이 회사 ‘세대교체 인사’의 상징이다. 특히 시멘트 운송을 주로 하는 쌍용해운까지 책임지게 돼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강원도 동해·영월 공장 방문을 마치고 14일 아침 서울 저동 본사에 출근한 김 사장은 “위기 상황에서 두 회사의 경영책임을 맡은 만큼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회사 CEO를 맡은 데 대해선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볼 만하다”고 했다.

국내 2위 제지회사인 무림페이퍼의 김인중(59) 사장은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서울 신사동 사무실을 나와 울산으로 출장을 간다. 출장이라기보다 ‘출근’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김 사장이 울산시 온산공단에 있는 동해펄프의 CEO를 겸임하고 있어서다. 무림페이퍼는 신사동에 본사가 있지만 동해펄프는 사무실과 공장이 울산에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2004년 말 무림페이퍼 사장에 취임할 당시 특수지 제조회사인 무림SP의 대표도 동시에 맡았다. 대표이사 명함이 세 개나 되는 셈이다. 김 사장은 “(동해펄프를)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펄프 생산라인 옆에 제지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어 화·수·목요일은 주로 울산에 머문다”고 말했다.

현대산업개발 계열의 건물관리 회사인 아이서비스의 이치삼(55) 사장은 사업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풍납동 아산병원, 장충동 신라호텔, 서린동 SK사옥 등 전국에 80곳이 넘다 보니 챙길 일이 많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오전 ‘호텔리어’로 변신한다. 지난 1월 서울 강남의 특급호텔로 현대산업개발 계열사인 파크하얏트의 대표이사를 겸임했기 때문이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 전담 비서도 없이 일하는 그는 “고교 동창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고 교회 봉사도 한다”며 여유 있게 웃는다.

위기 시대를 맞아 전문경영인으로 두 개 이상 회사의 경영을 책임진 ‘겸임 CEO’가 주목받고 있다. 앞에 예를 둔 세 CEO 외에도 김인(60) 삼성SDS·삼성네트웍스 사장, 허영호(57) LG이노텍·LG마이크론 사장, 전상일(56) 동양메이저·동양시멘트 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으론 기업의 ‘얼굴(CEO)’ 역할을 하면서 ‘손발(사업부문장)’로 일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윤우(63)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월부터 디바이스솔루션(부품) 부문장을 겸직하고 있다. 몇몇 CEO는 해외사업본부장이나 기술담당 최고임원, 연구소장 등을 동시에 맡아 특정 부문 역량 강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도표 참조>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코앞에 닥친 위기를 현명하게 헤쳐나가는 한편, 새로운 성장 기회를 찾는 것이다.

위기관리 탁월한 업계 베테랑
이들은 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베테랑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화려한 성적표’를 자랑한다.

김인중 사장은 삼성 비서실에서 일하다 87년 무림페이퍼로 옮겼다. 인상적인 흰머리 때문에 ‘백발백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는 20년 넘게 기획 업무를 해 와 업계에선 ‘기획통’으로 통한다. 무림페이퍼는 지난해 6월 동해펄프를 사들였다. 인수 검토부터 완료까지 2년여 걸리고 투자액이 3095억원 들어간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도 김 사장이다. 동해펄프의 CEO를 맡는 게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오너인 이동욱 회장은 그에게 “인수를 성공시킨 만큼 잘 키우는 것도 맡아 달라”고 주문했다는 후문이다.

이치삼 사장은 2005년부터 2년간 파크하얏트 대표를 지낸 적이 있다. 더욱이 그는 이 호텔 부지 매입 때부터 참여했던 인물이다. 덕분에 호텔에 걸린 시계 위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 용산 현대역사 개발, 아이타워 매각(현 강남파이낸스타워) 등 현대산업개발의 주요 사업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김용식 사장 역시 쌍용양회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업계 베테랑이다. 기획실에 근무하면서 자회사 관리 업무를 한 적이 있어 쌍용해운 일도 크게 낯설지 않다.

물론 주어진 미션은 모두 다르다.

김인중 사장은 요즘 동해펄프 생산라인 바로 옆에 제지공장을 짓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무림은 2011년까지 4000억원을 투자해 연산 45만t 규모의 펄프·제지 일관화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김 사장은 “펄프 공장에서 막 생산된 수분 상태의 펄프를 공급받아 제지 생산설비를 가동하면 전기·스팀 등 가동 비용을 20% 이상 줄일 수 있다”며 “동해펄프가 2011년엔 6700억원대 매출을 올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2870억원이었다.

목표가 크다 보니 할 일도 많다. 먼저 좋은 조건으로 기계 설비를 들여오는 게 최대 현안이다. 원화 가치가 급락하는 바람에 기계 수입가격이 50% 넘게 올랐기 때문이다.
이치삼 사장은 국내 최고급 부티크 호텔로 안착한 파크하얏트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게 과제다. 한편으론 신사업도 옴팡지게 벌여 놨다. 아이서비스는 지난해 ‘아이케어’라는 브랜드로 요양 복지사업을 시작했고, 주택·사무실 리모델링 사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파크하얏트 역시 부산 우동에 새 비즈니스호텔을 짓기로 했다. 이렇게 다양한 사업을 하다 보니 집안에서 그는 ‘잡(雜)사장’으로 불린다.

쌍용양회는 지난해 1조1000억원대 매출을 올렸지만 1400억원 넘는 적자가 났다. 2년 연속 적자다. 지난해 10월 비상경영에 들어갔다. 출근시간을 1시간 당겼고, 토요일에도 정상 출근한다. 임직원 급여도 일부 반납했다. 건설경기 침체에다 원·부자재 값 급등이라는 직격탄을 맞은 탓이다. 김 사장은 그러나 “쌍용은 저력이 있는 회사다. 임직원에게 ‘올겨울엔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쌍용해운을 키우는 숙제도 그에게 맡겨졌다. 이 회사의 600억원대 매출 가운데 70%가 쌍용양회와 관련된 것이다. 김 사장은 “시멘트 이외의 사업 비중을 높여 회사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서두르는 법 없어
기자가 겸임 CEO 취재차 만난 김인중·이치삼·김용식 사장에게선 특이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인중 사장은 가급적 주초에 몰아서 무림페이퍼·무림SP 업무를 처리한다. “덕분에 임직원이 일하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 김 사장의 말이다. 그는 또 “회장이 나 대신 임원을 찾는 일이 잦아져 좋다”고 했다. “회장은 일이 있으면 사장을 먼저 찾게 마련인데 지금은 (지방에 머무는 일이 잦다 보니) 이게 힘들어졌어요. 회장 앞에서 제대로 보고하려니 임원 간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져 회사로선 부가소득이 큰 것 같습니다(웃음).”

이치삼 사장은 오히려 현장 경영을 강화했다. 그는 매주 화요일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이서비스 임원·간부 10여 명과 함께 주요 사업장을 방문한다. 10일에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서울역 게이트타워, 인천 송도 RFID센터, 경기도 이천 프로로직스 물류센터 등 10여 개 사업장을 다녀왔다. 200㎞ 가까운 강행군인데 이 사장은 임원과 번갈아 가면서 운전을 했다. “급하게 생각할 게 없어요. 호텔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는 거지요. 도리어 유리할 수 있어요. 다른 호텔은 물론 사무공간·너싱홈·콘도 등을 다니면서 호텔 비즈니스와 연계가 가능한지 볼 수도 있고요.”

두 사람에 비하면 김용식 사장은 그래도 유리한(?) 편이다. 챙겨야 할 두 회사 사무실이 모두 서울 저동 쌍용빌딩 3층(쌍용양회)과 17층(쌍용해운)에 있어서다. 그는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쌍용해운 일을 집중적으로 처리한다”고 말했다.

이치삼 사장은 “CEO가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려고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사무실에 들어오는 부하 직원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무슨 보고서를 가져올지 짐작이 갑니다. 이럴 때일수록 CEO는 모르는 척해야 합니다. CEO가 결론부터 미리 내고 사인해 주면 보고서 하나 때문에 며칠 밤을 새웠을 부하 직원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거지요. 그래서 두 개 회사를 맡고 나서부터는 한 템포 느리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시절 코오롱 그룹의 건설·엔지니어링·호텔·A&C·스포렉스 등 7개사 대표이사를 겸임했던 민경조 코오롱 고문도 이 사장과 비슷한 조언을 했다. 그는 “임원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7개사를 모두 챙기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유일한 방법은 임파워먼트”라고 잘라 말했다.

자칫 동맥경화 부를 수도
“회사 출근 첫날 규정집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그런 다음 전결권을 본부장급에게 위임하고 월 한 차례 정도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본부장들이 책임감을 갖고 일을 더 잘합디다. CEO가 모두 챙기려고 욕심 내면 몸만 망가질 뿐입니다.”

동서대 이장희(경영학) 교수는 겸직 CEO의 특징으로 ▶개방과 공유 문화에 익숙하고 ▶의사결정 스피드가 빠르며 ▶조직에 대한 남다른 로열티를 꼽았다.

“유능한 CEO가 몇 개 회사 경영을 겸직할 경우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지고 효율성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검증받은 인재, 통찰력이 있는 인재라는 전제조건이 따릅니다. 대우그룹이 좌초한 원인의 하나로 ‘리틀 김우중’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 꼽히곤 합니다. 대기업 오너가 자신의 ‘닮은꼴’ 전문경영인만 중용하면 쓴소리하는 이가 줄어들게 마련이지요. 조직에 동맥경화가 일어날 우려도 배제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위기일수록 ‘인재’가 다시 조명받는 것입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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