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으로 몽골로, 국경 뛰어넘는 의료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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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구개열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무료로 수술해 온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 소속 의사들이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범준(시카고램브란트치과)·황재홍(서울물방울치과)·한국재(한치과의원)·조병욱(베스티안병원)·박영주(강남성심병원) 의사. [김태성 기자]

“이 아이가 다니카예요. 참 예쁘죠?” 베스티안병원 구강외과 조병욱(65) 과장이 오래된 사진을 보여줬다. 까무잡잡한 작은 얼굴에 다갈색 눈동자가 커다란 두 살배기 여자아이의 사진이었다. 미소 짓는 아이의 윗입술엔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구순구개열(언청이) 수술의 흔적이다.

조 과장에게 다니카는 잊을 수 없는 환자다. 해외 구순구개열 수술 봉사를 시작한 2001년에 처음으로 집도를 한 아이다. “코 아래가 완전히 갈라진 채 태어났지요.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새서 젖도 제대로 못 빨아먹었어요.” 우리 돈으로 50만원 안팎의 수술비지만 필리핀에선 웬만한 중산층도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1000명에 2명꼴로 태어나는 필리핀 구순구개열 환자들은 그래서 대부분 수술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이런 상황을 접한 조 과장은 한국재(51) 한치과의원장을 비롯한 후배 치과의사 6명과 함께 9년째 해외 봉사를 펼쳐 왔다. 매년 한두 차례씩 필리핀 마닐라 등지를 찾아 구순구개열 환자를 무료로 수술해 줬다. 지금까지 수술을 받은 아이는 모두 90여 명. 적게는 하루 세 명, 많게는 여섯 명까지 수술했다. “수술방 마취 기구가 낡아서 마취 가스가 조금씩 새지요. 여섯 명을 수술하던 날은 수술실을 나서니 정신이 몽롱하더군요.”

조 과장이 저소득국가 어린이의 구순구개열 수술에 마음을 쏟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한구강악안면외과학회장을 지낸 그는 구순구개열 수술의 권위자다. 그는 1970년대 랠프 밀라드란 미국 치과의사가 쓴 구순구개열 수술법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수술법을 개발한 밀라드는 수술법을 확립하는 무대를 한국으로 삼았다. 책에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 구순구개열을 앓던 아이들을 지게로 날라 가며 수술하던 사진이 담겨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이 어찌나 마음 아프던지요. 필리핀의 아이들을 봐도 남의 나라 아이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여유가 생기면 다른 나라에서 이런 수술을 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봉사팀은 이제 본격적인 해외 봉사에 나선다. 다음 달 몽골 울란바토르에 무료 진료센터를 열게 된 것이다. 몽골 보건부 장관이 직접 나서 환자 모집을 돕고 진료 허가를 내주겠다며 협정을 체결했다. 조 과장과 뜻을 함께하는 후배 치과의사 20여 명이 돈을 모아 6500만원 상당의 수술 기자재를 마련했다.


정식으로 봉사를 펼치기 위해 비영리 사단법인도 세웠다. 이름은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으로 지었다. 가을볕이란 뜻의 추양(秋陽)은 조 과장의 호다. 열매를 맺게 하는 가을볕처럼 따뜻함이 가득한 재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앞으로 치과의사뿐 아니라 양·한의사들이 골고루 참여하는 봉사단체로 확대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단체가 있어야 하잖아요.” 이 재단은 21일 서울팔레스호텔에서 창립식을 연다.

글=임미진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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