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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미진이 본 광주비엔날레…작품선정 수준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국제화의 거센 물결을 헤치고 지역문화가 부각되는 시점에서, 광주 비엔날레는 더 없이 소중한 행사였다.

문화시대로 이어지는 다음 세기를 내다볼 때, 자동차 공장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

더군다나 한국 고대문화의 전통을 토양으로, 현대사의 통증을 자존심으로 배양된 자리였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올해의 행사는 특히 흡입력 있는 전시기획이 돋보였다.

지난번 의지도 그리기에 이어 '지구의 여백' 으로 이어지는 주제선택과 '속도 (Speed.水)' '생성 (Becoming.土)' '혼성 (Hybrid.木)' '권력 (Power.金)' '공간 (Space.火) 등 소주제에서 힘찬 구성이 느껴졌다.

아직 '차별성' 문제가 표면에 남아있지만, 작품수준면에서 휘트니나 베니스 등 여타의 비엔날레와 비교해 큰 손색이 없었다.

20세기에서 가장 빠른 미술가는 누굴까. 적어도 이번 전시에서 가장 스피드한 작가는 벤 보티에다.

그는 여러개의 캔버스를 한꺼번에 겹쳐놓고 총을 쏘았다.

총알이 관통된 캔버스들. 눈깜짝할 사이에 창출된 다발의 이미지…그때 어디선가 '행복은 느림이다' 라고 되뇌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속도에 의해 축소된 지구촌의 삶에서 그레고리의 세트 이미지는 평온한 일상 속에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위험을 경고한다.

길버트와 조지의 '피, 눈물, 정액, 오줌' 은 네 발 달린 짐승의 분비물을 파노라마적으로 증식시키고, 모나 하툼은 이렇게 묻고 있다.

그대 '옥죄는 빛의 그림자' 의 공포와 아름다움을 아는가?

'공간' 전시실을 끝으로 본전시장을 나서는 관객의 얼굴에는 이 가을의 햇살에 어울리는 사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광주 비엔날레가 무조건 좋은 볼거리만 제공한 것은 아니다.

우선, 여유로운 시각여행을 떠나온 사람을 시종일관 질리게 만든 그 소음을 빼놓을 수 없다.

유치원생부터 일반인까지 단체관람을 온 사람들은 힘껏 맘껏 떠들었다.

전시장 밖의 때아닌 호객행위에다, 조잡한 확성기에서 흘러나온 디스코 음악에 갑자기 목줄기가 뻣뻣해졌다.

택시 운전수는 영업중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 바로 앞까지 차를 인도해주었고, 광주시민들은 너무나 친절했다.

그렇지만 전시장 입구부터 서슴치 않고 안내를 지망하고 나선 화살표는 결코 반가운 친절이 아니었다.

현대미술의 어머니가 '자유로운 상상력과 미로찾기' 가 아니었던가.

현대미술의 특징은 작품의 순위를 가릴 수 없다는데 있다.

그러나 미술제에는 분명 순위가 있다.

외국의 어느 비엔날레에 비해 빠지지 않는 작품을 들여왔다고, 광주 비엔날레가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듯 하루아침에 이름 난 문화제로 둔갑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구경거리는 관객이 들기 마련이다.

좀 힘에 벅차면 늦춰도 되고, 행여 쉬어가도 누가 뭐라겠는가.

입장료가 조금 더 비싸다고, 관객이 좀 더 줄어든다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훌륭한 미술제를 보고 싶은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라도 올 것이다.

광주 비엔날레가 더 많은 양이 아닌, 더 높은 질로 우뚝서길 기대해 본다.

김미진〈화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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