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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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내가 지닌 환상의 실체. 괴괴한 정적과 끈끈한 녹색 기류가 뒤섞이는 동안, 나의 시야에서 여자는 서서히 모습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감각을 열어놓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라던 오기욱의 말이 맹렬한 독기운처럼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여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나의 눈에는 가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가면이 보여도 가면 뒤의 얼굴이 누구인지를 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오, 이런 신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환상이 깨어진 에메랄드 궁전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비탄과 시름으로 나날을 보내는 가련한 한 여자와 조우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목말라하던 그녀 인생의 미지 (未知) , 그것이 이제 내 목전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가슴이 저리고 사무쳐서인가, 나도 모르게 서서히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거푸 두 잔의 술을 마시고 나서 나는 가까스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결국 이런식으로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꿈꾸던 방식은 결코 아닙니다.

" "날 원망하고 있나요?" "원망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난 너무 일찍 늙어버렸는지도 몰라요. 갓스물부터 지금까지 마음에 두 개의 서로 다른 궁전을 지니고 살아왔으니 그 버거움을 말해 뭣 하겠어요. 난 지금도 환상이 유지되는 에메랄드 궁전에 살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럽고 행복한 삶이 아니라 갇혀 지내는 삶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 "…생각해 보면 누구나 갇혀서 사는 거죠. 연민을 지니고 있으면 마음의 성벽이 더욱 견고해지는 법이예요. 진정 날 사랑했다면, 나로 인해 자신을 가두지 말고 나를 위해 자신을 풀어주세요. " "난 환상이 깨진 에메랄드 궁전에서 당신이 날마다 슬픔과 비탄에 젖어 나날을 고통스럽게 보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젊은날을 보냈어요. 그리고 녹색 피톨이 뛰던 젊은날은 이제 스러졌지만, 그래도 나는 내 정신의 본향처럼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목말라하고 있어요. 이제 그만 환상이 깨진 당신의 궁전을 포기하면 안되나요? 그리고 죽기전에 한번만이라도, 당신과 내 영혼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살아가면 안되나요?" "…모든게 안타깝고 아쉽다고 해도, 그래도 돌이킬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거, 이런 환상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세요. 인생은 너무 건조하고, 인간들은 너무 메말라 있어요. 하지만 이제 모든 상처를 잊고 나를 느껴 보세요. 이렇게 환상이 유지되는 공간에서는 내가 당신을 얼마든지 촉촉하게 적셔줄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 아무것도 망설이지 말고 나에게 오세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느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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