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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오, 지옥같은 세상의 천사가 바로 이곳에 있었군. 그런데, 천사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뭐요?" 그녀가 따라주는 잔을 다시 받으며 나는 물었다.

"그건 손님들에게 환상을 주기 위해서예요. 예를 들어 말을 하자면…… 음,에메랄드 궁전과 선생님 사이에 아픈 사연이 얽혀 있다고 가정하면, 선생님이 저를 그 사연의 대상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가면과 술, 뭔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로군. 정신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환자들이 직접 자기 불행의 주연 역할을 하는 연극 말이요. " "네, 원리는 비슷한 거죠. 누구나 상처받고 영혼이 병들어가는 과정, 그게 또한 인생 아닌가요?" 녹색으로 물든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리며 여자는 물었다.

"근데, 헤라.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조리정연하게 잘하는 거요? 혹시, 이런 질문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학력을 알고 싶소. " "죄송해요. 여기서는 손님들에게 개인 신상에 관해서는 절대 언급할 수 없어요. 신상명세가 노출되면 가면이 무의미해지고…… 게다가 환상이 깨어지거든요. " "그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상으로 빠져드는 일과 술을 마시는 일, 그리고 또 뭐가 있소?" 다시 잔을 비우고 아슴한 눈빛으로 그녀를 건너다보며 나는 물었다.

취기 때문인가, 그녀의 피부를 적시는 녹색 조명이 흥건한 수분처럼 선정적으로 보였다.

"무엇이든, 선생님이 원하시는 건 다 할 수 있어요. " "다?" 지나치게 모호한 느낌과 지나치게 뚜렷한 느낌이 동시에 들어서 나는 물었다.

"선생님은 남자고 저는 여자예요. 그리고 여기는 녹색 조명으로 채색된 뮤즈의 낙원이예요. 저는 선생님이 상상하는대로 변할 수 있는 여자이고, 선생님이 원하시는대로 응할 수 있는 여자예요. 오늘밤, 선생님이 낙원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거죠. " 미묘한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어조로 여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결국 모든게 나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 말이로군요. " "네, 원하시면 언제든 저를 가지실 수 있어요. "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나는 뭔가가 섬뜩하게 뒷덜미를 만지는 것 같아서 어깨를 흠칫했다.

하지만 다소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한잔의 술을 마신 직후부터 나는 참으로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의 일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녀도 말없이 나의 주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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