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눈 지옥서 만난 ‘길 위의 천사’

중앙일보

입력 2009.03.16 02:27

업데이트 2009.04.3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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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대체 누굴까?”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지난 한 달 롯데마트 본사 직원들 사이엔 ‘천사 찾기’ 소동이 벌어졌다. 소동은 지난달 4일 인터넷 홈페이지 고객소리함에 글 하나가 오르면서 시작됐다. 작성자는 경기도 부천에 사는 주부 류진(45)씨로 설 연휴 때 귀향길에서 겪은 일을 적은 것이었다.

류씨와 남편, 두 딸이 차를 타고 전북 정읍의 시댁으로 가던 길은 폭설로 더디기만 했다. 저녁 무렵 충남 당진 부근 국도를 지날 때였다. 갓길에서 스노 체인을 손보고 다시 차를 움직이려는데, 차 바퀴가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에 파묻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가족이 모두 차에서 내려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다. 그럴수록 차 바퀴가 헛돌면서 눈 구덩이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보험회사와 119에 구조를 청했으나 “사고 처리로 인력이 부족하니 기다려 달라”는 답만 돌아왔다. 날은 어두워지고 눈발은 거세졌다. 차들은 계속 도로 위를 스쳐갔을 뿐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아 히터도 켜지 못한 채 추위에 떨어야 했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화물차 한 대가 차 뒤에 멈춰섰다. 화물차에서 내린 남자는 삽을 들고 뛰어왔다. 설 선물 제품을 운반하던 배송 기사였다. 눈보라 속에서 남자는 류씨 가족과 함께 두 시간 가까이 사투를 벌였다.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차가 간신히 도로 위에 올라섰고, 류씨 가족은 무사히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설 연휴 후 집으로 돌아온 류씨는 화물차에 새겨져 있던 롯데마트 마크를 기억해 냈다. “눈길 위에서 만난 천사를 찾아 달라”는 류씨의 요청에 본사에서 한 달 가까이 수소문했지만 자신이라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결국 당시 배송 기사들의 동선과 스케줄 표를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천사’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협력업체 배송 기사 고진수(36)씨였다. 본사에서 대표이사 표창을 받게 된 고씨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라며 겸연쩍어 했다. 류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 가족을 지옥에서 구출해 준 기사님께 식사라도 한끼 대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천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과 마음 사이에 있었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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