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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스토리를 만든 작은 도시 그라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5호 38면

이번 정월 대보름은 50년 만에 가장 큰 보름달이라며, 어느 지인께서 평생에 다시는 못 볼 테니 잊지 말고 꼭 보고 소원도 빌라는 메시지를 주셨다. 그는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어느 날, 시청 앞 서울광장에 커다란 보름달을 띄웠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누구나 그 달을 보며 월드컵에 대한 기원과 꿈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내게 조명 디자인을 부탁했던 분이다.

미처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나타나는 상큼한 초승달, 가슴에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어린 시절의 반달, 뒷마당 장독대에 정화수 한 사발 떠 놓고 간절한 소원을 빌던 어느 여인네의 꽉 찬 보름달…. 어디 그뿐인가. 베토벤의 월광을 들으며 하얀 건반 위로 떨어지는 달빛에 가슴 저려 했던 사춘기 시절의 기억과 달동네의 애환이 절절하게 그려졌던 서울의 달까지. 한강의 수면 위에 고요히 떨어지던 그 달빛을 비웃기라도 하듯 요즈음 도심지 빌딩 속의 불빛에 가리어진 달은 자꾸만 더 작고 쓸쓸해 보인다.

몇 해 전 행정복합도시의 야간 경관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기 위해 유사 도시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도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유구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어야 하고, 일상의 삶이 담겨 있어야 하며,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움직이고 변하며 마음을 주고받는 정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야간의 도시 경관은 감성을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그라츠는 많은 감동과 느낌을 주었다. 자동차로 2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도시이지만 국제공항이 있을 정도로 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었다.

그라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래된 세월 속에 신구 갈등이 도시 전반에 깊은 상처를 내고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도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드는 대역사가 시작됐다. 빛을 사용한 야경 디자인이 신구 갈등을 조화로 바꾸어 놓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도시의 한복판을 흐르는 센 강을 중심으로 구도시와 신도시는 나뉘어 있지만, 주간에는 오래된 전통 건물 사이에 파격적인 건축물이 시각적 랜드마크 역할을 하였고, 야간에는 새로운 기술이 접목된 빛들이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이 도시가 왜 이렇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일까. 신기술의 표현이야 낯선 이방인에겐 신기하게 보일 테지만 알 수 없는 친근감과 편안함, 그리고 조용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도시의 중심에 작은 산이 있었는데, 아담한 산꼭대기에 오르는 누드엘리베이터 방식도 신기하고 즐거웠지만 산 정상에 오르니 그림같이 소박한 타워와 동화에 나오는 듯한 장미정원, 그리고 전 도시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근사한 카페에 앉아 오후 내내 도시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마지막 황금빛 햇살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던 그 순간 갑자기 도시는 화려한 광채로 눈부시게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이내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푸르름이 조금씩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투명한 반달이 수줍게 보이고 있었다. 그 맑고 순수한 느낌이란…. 샴페인 잔으로 별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카페에는 보름달 같은 조명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고 내려다보이는 도시 저 아래도 밤을 맞이하는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는 조용조용 어둠 속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건물들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밝은 한낮에는 부조화스러워 보기 싫었던 건물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위치조차 알 수 없었다. 도시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은은하면서 강약이 있으며, 조용하면서도 활기가 넘쳤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빛의 라인을 따라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낮의 쇼핑거리는 영업시간이 지나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인공 빛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쇼윈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매장의 매혹적인 내부는 내일 오픈을 하면 다시 와 꼭 무언가를 사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거리마다 새로운 빛으로 만들어져 주간과는 다른 낭만과 활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이렇듯 도시는 낭만이 있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서울에 돌아와 주변을 돌아보니 우리는 어느새인가 큰 달만을 찾기 위해 연연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크기가 큰 달을 찾기 위해 뛰기보다 달빛 한 스푼 마음에 풀어 즐기는 여유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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