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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따기]루브르미술관 벽화 그리는 이종상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드륵드륵 - .

엷게 모터 도는 소리와 함께 램프의 빨간불이 깜빡이고 컴퓨터 화면이 움직인다.

큼직하게 그려넣은 드로잉을 작게 축소해 놓고 보니 어딘가 허전한 듯하다.

다시 클릭해서 적당히 키운다.

키웠다 줄였다, 없앴다가 다시 넣는 것을 전부 마우스의 클릭으로 해내고 있다.

한국화가 이종상 (李種祥.서울대 교수) 씨는 유난히 무더웠던 올 여름을 스케치북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보냈다.

오는 11월5일부터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선보일 새로운 벽화작업의 구상 때문이다.

높이 얼마에 길이 얼마라는 보통의 벽화 작업과 달리 이번 루부르 작업은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무너진 성벽 위에 성벽을 살리면서 벽화를 걸기 위해서다.

장소는 루브르 지하공간인 카루셀. 카루셀은 지난 90년대초 유리 피라미드 입구 공사때 지하에서 발굴해낸 중세 성채를 그대로 살려 만든 공간이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 외무성이 외국과의 문화교류의 장으로 활용하자는 안을 내면서 문화성 협조를 얻어 처음 현대미술전시가 열리게 된 것이다.

첫번째로 초대된 작가가 李씨를 비롯해 한국의 문신.이대원씨등 3명. 전시공간으로 쓰일 장소는 카루셀의 일부인 7백50평 크기의 샤를 5세 룸이다.

이곳의 벽면의 길이는 60m 남짓. 바닥에서 천장까지 성벽 전체가 무너진 곳이 5m쯤이고 나머지는 허물어진대로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수를 해놓은 곳이다.

높이는 들쭉날쭉하지만 이종상씨는 여기에 길이 60m의 초대형 벽화를 만들어 걸 예정이다.

스스로 벽화작가 (Muralist) 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는 李씨는 이미 국내에서 여러 차례의 대형 벽화작업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여의도에 3층 높이의 작품을 해낸 커리어도 있다.

여름이 가을을 위해 땀 흘리는 계절이라면 그는 루브르 전시를 위해 충분히 땀을 흘린 셈이다.

한.불관계를 말해주는 각종 자료조사나 작업장 확보 같은 하드웨어쪽 말고도 구상쪽이 특히 그렇다.

이번 작업은 종이가 재료. 한국 그림이 종이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60m 길이를 커버하기 위해 벽화는 10여 토막을 내 현지에서 보내지고 그곳서 조립돼 걸릴 예정이다.

난제 (難題) 이자 하일라이트는 바로 조명. 장지의 투명성을 십분 살린다는 뜻으로 이번에는 뒤편에서 조명을 칠 예정이다.

문제는 조명장치가 들어갈 벽과 벽화와의 공간이 15㎝에 불과하다는 것과 조명으로 드러나게 될 그림의 이음매 처리다.

지난 여름 가장 많은 땀을 흘린 부분이 바로 배접자국이 없는 배접 기술의 고안이었다.

바로 얼마전 벽화작업의 노하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벽화는 병인양요에서 시작되는 한.불 관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 내용. 뒤편 조명에 의해 실루엣으로 비치게 될 프랑스 함선이 강화바다 앞에 떠있고 멀리 산자락이 강화 포구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포구의 옹벽을 그려넣지 않고 대신 샤를 5세가 지은 카루셀의 성벽을 살려 그림과 연결시킨다는 구상이다.

루브르가 자랑하는 프랑스 문화유산을 한 순간에 조선의 것으로 치환 (置換) 한다는 발상이다.

"불평등에서 시작한 양국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바꾸어 상징하고 싶었다" 는게 샤를 5세 성벽을 이용하게 한 계기라고 李씨는 말하고 있다.

시뮬레이션 작업은 이제 막바지. 3천m나 주문해놓은 장지가 도착하는대로 그는 붓을 들 예정이다.

평소 그가 늘 주장해온, 기 (氣)에 근거한 원형상 (元形象) 이란 한국적 자생그림을 먹물을 듬뿍 찍어 휘두를 것이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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