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강위석 칼럼]자유시장제도 살릴 책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포드자동차회사가 우리나라 재정경제원에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존경하는 윤증현 실장님, 포드자동차회사는 기아자동차회사가 한국의 화의법에 의해 서울법원에 화의신청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포드는 이 기회를 통해 우리와 같은 수동적 입장에 있는 주주들의 권익이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 윤증현 실장은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이다.

이 편지의 핵심은 '수동적 입장에 있는 주주의 권익' 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포드회사가 이런 일반적 권익을 위해 이 편지를 보낸 것은 아니다.

기아자동차 총 발행 주식의 17%에 달하는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권익을 위해 쓴 편지다.

특히 기아가 법정관리로 넘어갈 경우 경영에 책임이 있는 대주주로 취급돼 자기네 지분의 3분의2가 소각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포드사의 이런 개별적 이해 (利害)가 일반적 주주의 권익이라는 자유시장경제를 구성하는 기본적 토대 위에 서 있음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아는 '국민기업' 이라고 알려져 왔다.

주식의 분산이 잘 이뤄져 있음에 붙여진 칭호다.

그러나 이 칭호는 대단히 기만적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기아사태란 기아의 채무서비스 불능사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승패는 병가 (兵家) 의 상사 (常事)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경영실적이야 좋았다가 나빴다가 할 수 있다.

기아사태는 경영 실패 이후 아무가 아무에게 져야 할 책임이 거론됨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 경영진과 노동조합은 기아를 자기네 수중에 그대로 두고 금융지원만 계속 해주는 것을 '기아 살리기' 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점이 기아사태의 진면목 (眞面目) 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식회사제도가 아직 활짝 피어나지 못했다.

대주주가 경영을 장악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대주주 전횡이 판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상태가 그래도 차선이다.

군소주주에 대한 투명성은 떨어지지만 군소주주와 이익이 일치하는 부분이 크므로 대주주 경영자의 책임감에는 비빌 언덕이라도 있다.

은행경영에선 이런 대주주 대신 정부가 때로는 몸을 숨기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면서 참월 (僭越) 해 주주의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바람에 관치 (官治).무책임 경영이 부실채권과 그밖의 비효율을 양산하고 있다.

기아의 경우는 또 다르다.

경영진과 노동조합이 주주권의 찬탈 (簒奪) 을 자행했다.

주주들은 이들 반역 영주때문에 성 (城) 밖으로 쫓겨나가 돈만 댄 한낱 익명의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주주야말로 주식회사의 진짜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아로부터 빚을 못 받는 금융기관에는 이로 말미암아 신용공황이 일어날까봐 켕긴 나머지 한은 (韓銀) 이 특융을 한다, 정부가 출자를 한다, 뒤늦은 법석을 떤다.

그 은혜는 은행뿐만 아니라 종금사를 거쳐 증권회사까지 뻗치고 있다.

그래서 이들 금융기관의 예금주들은 돈을 떼일 염려가 줄고 금융결제시스템은 와해 (瓦解) 의 위기로부터 보호된다.

"기아가 부도가 났다고 해서 민간기업 차원의 투자자 권익을 정부가 보장해줄 수는 없다.

" 이 말은 전술 (前述) 포드사의 편지에 대한 윤증현 실장의 코멘트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그는 놓치고 있다.

포드사가 전제로 삼는 것은 '수동적 입장에 있는 주주의 권익' 이다.

좋게 말해 수동적이지 일반 주주들은 기업경영에서 완전히 폐위 (廢位).위리 (圍籬) 돼 있음이 지금같은 '기업 위기' 를 맞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재경원과 증권감독원은 개별 투자자 아닌 주식회사제도의 궤멸 (潰滅) 을 방지할 책임이 있다.

증권감독원은 직권으로 기아의 주총 (株總) 을 소집토록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선택의 폭은 좁을지라도 거기서 기아의 앞날이 결정돼야 한다.

살아남기 힘든 지금같은 어려운 경제의 환절기를 맞아 오히려 이를 좋은 계기로 삼아 주식회사제도, 나아가 자유시장제도를 살리는 것은 한국 경제의 효율화 역정 (歷程)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논설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