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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기를 찾아서]35.로마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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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로마는 마지막으로 보아야 하는 도시’라고 합니다. 장대한 로마유적을 먼저 보고 나면 다른 관광지의 유적들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의 자부심이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제일 먼저 로마를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장 진지하게 반성할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문명관(文明觀)이란 과거문명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가치관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거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격언이 말해주듯이 로마는 도시의 대명사이며,로마제국은 국가의 대명사로 군림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는‘Roma’를 거꾸로 표기하면 라틴어의 사랑이란 단어‘Amor’가 된다는 것까지 찾아내어 로마에 대한 애정을 헌사하고 있습니다. 트래비 샘에는 다시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동전을 던지며 로마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에서는 이미 우리의 머리속에 깊숙히 각인된 로마의 역사와 눈앞의 장대한 유적들이 행복한 결합을 함으로써 로마에 대한 경탄과 애정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로마의 휴일’의 현장은 그 영화가 보여주던 낭만과 환상을 이 도시에 입혀 놓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정신의 앙등은 로마의 영광을 인류사의 업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이곳을 찾아온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나누어 받게 되는 행복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건설되지 않았다”는 경구가 있듯이 로마는 로마인만의 힘으로 건설되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수많은 피정복민의 피땀과 재물로 건설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동서고금의 어떠한 제국의 건설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테베레강가의 작은 언덕에서 농업국으로 입국(立國)한 로마인들의 근검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후의 제국건설이 비록 약소국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로마의 문명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영광을 로마인의 근검성과 실용적 문화로 설명한다는 것은 로마의 가장 아름다운 프로필에만 앵글을 고정시키는 영상의 트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2천만원 이상의 저축에 대해서는 근검 절약 이외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의 재부에 대해서도 근검 절약으로 설명하는 것은 위선이라 하였습니다. 로마의 영광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영광을 용기와 도덕적 힘과 법치로 설명함으로써 제국(帝國)을 합리화하고 동시에 자기민족의 제국주의를 변호하려는 어느 문필가의 저의에 마음 편치 않다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로마유적을 돌아보면서 내내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위용을 자랑하는 곳곳의 개선문과 역대의 수많은 장군들이 승전보(勝戰報)를 들고 말을 달려 들어오던 신성한 길(Via Sacra),전승(戰勝)에 은총을 내리던 신전. 어느 것 하나 마음을 무겁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 마음 어둡게 하는 것은 수많은 관광객의 줄을 이은 찬탄입니다.

로마의 유적에 대한 찬탄은 제국(帝國)에 대한 승인과 동경을 재생산해내는 것입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유산 가운데 40%가 로마에 있다는 사실은 세계사의 현주소를 걱정하게 합니다. 나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문명관을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느 유적 앞에 서서 그 장대함을 경탄하는 행위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북을 쳐서 키우고 박수쳐서 키우고 칭찬하여 키운다는 옛말이 있듯이 나는 로마에서 우리가 키우고 있는 영웅상과 패권문화로 말미암아 발길이 무거워집니다.

베네치아광장에 있는 비토리아노를 바라보면 그 실상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비토리아노는 이탈리아 통일 50주년을 기념하여 로마양식을 집대성해 건설된 전승기념관입니다. 이 위풍당당한 기념관 앞에 서면 비아 사크라를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던 장군들의 얼굴과 여기서 연설하던 무솔리니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쓸쓸해집니다. 고대 로마의 영웅들과 무솔리니는 얼마나 다른가하는 의문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가장 먼저 로마를 방문하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맨 마지막으로 보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콜로세움입니다. 맹수와 맹수,사람과 맹수,사람과 사람이 혈투하던 원형경기장입니다. 1백만 인구를 가진 로마가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경기장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 경기장이 로마인에게 미쳤을 영향의 막중함을 짐작케 합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건물 앞에 서서 건물을 바라볼 때는 그 크기를 보기 전에 먼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건물인가,누구를 위한,누구의 건물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폐허가 되어 있는 콜로세움을 돌아보는 동안 이곳에서 혈투를 벌이다 죽어간 검투사들의 환영이 떠올라 극도로 어두운 마음이 됩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스탠드를 가득히 메운 5만 관중의 환호소리입니다. 빵과 서커스와 혈투로 열광하던 이 거대한 공간이 내게는‘여민락(與民樂)’의 광장이 아니라‘우민(愚民)’의 광장으로 다가옵니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한다”고 하는 말이 콜로세움의 위용을 찬탄하는 명구로 회자되지만 내게는 콜로세움이 건설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혀집니다. “로마는 게르만인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때문에 무너지리라”고 했던 호라티우스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어떠한 제국이든 어떠한 문명이든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그것을 떠받치는 하부가 무너짐으로써 무너지는 것입니다.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이것은 역사학의 기본입니다. 많은 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고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정복전쟁이 정지될 때 무너지기 시작하며 로마시민이 우민화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로마가 로마인의 노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설 때 그때부터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콜로세움은 이 모든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당신이 로마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로마제국은 과연 과거의 고대제국일 뿐인가. 그것이 상품이든 자본이든 정복이 정지되면 번영이 종말을 고하는 오늘날의 제국은 없는가. 우리들은 로마를 동경하지 않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로마의 유적이 보여주는 이러한 교훈에 귀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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