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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의사들이 나설수 밖에 없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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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금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지만 펠라그라란 질환이 있다.

전신에 걸쳐 발진.수포가 돋고 구토.설사가 나타나며 심하면 치매와 의식혼탁으로 사망하는 이 질환은 니아신이라 불리는 비타민부족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1914년까지만 해도 펠라그라가 전염병인 것으로 생각했다.

환자들이 격리수용됐음은 물론 돌보는 이없는 고아환자들은 거리에 방치돼 생명을 잃기도 했다.

펠라그라가 전염병이 아닌 비타민결핍증의 하나로 누명 (?

) 을 벗게 된 것은 미국인 의사 조셉 골드버거박사의 희생적 연구 때문이다.

그는 펠라그라의 안전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직접 환자의 혈액을 주사했는가하면 환자피부의 표피 부스러기와 대.소변을 먹어보이기까지 했다.

최근 국제에이즈치료의사협회 소속의사 50명이 사상 최초로 살아있는 에이즈 바이러스백신의 인체실험을 자청하고 나섰다.

전세계 여론이 이들의 용기와 결단에 찬사를 보냈으며 이들의 실험에 동참하려는 신청 역시 물밀듯 밀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최종유권해석기관이자 백신허가 전담부처인 미식품의약국 (FDA) 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하느님 다음으로 까다롭다' 는 악명 그대로 법에 규정한 모든 절차를 거쳐야만 인체실험신청을 허가하겠다는 것이다.

학계의 반응도 따뜻하지만은 않다.

독일의 저명한 미생물연구소인 로버트코흐연구소의 라인하르트 쿠르트소장은 '충분한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는 상태에서 실시하는 임상실험은 무모한 자살행위에 다름없다' 며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같은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국제에이즈치료의사협회의 의지는 확고하다.

FDA의 규칙대로 충분히 안전성을 확보하기까진 적어도 5년 이상의 동물실험기간이 소요되며 이때까지 하루 8천여명씩 모두 1천 5백만여명의 감염자가 속출하리란 것이다.

따라서 에이즈 정복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는 이미 90년대초 개발된 생백신의 인체실험을 더이상 미루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안전을 생각하는 동안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백신은 자칫 실험대상자들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백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사람을 희생시켜도 되느냐는 윤리적 비난도 가능하다.

게다가 FDA같은 정부기관은 속성상 관료적일 수 밖에 없으며 말썽이 일어나길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에이즈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의 책임있는 결단만이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전세계 42개국의 에이즈전문가 5천 5백여명이 모여 결성한 국제에이즈치료의사협회의 용기에 거듭 찬사를 보낸다.

생활부 홍혜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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