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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부활시키다-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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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970년대 인기리에 상영된 스릴러 영화 가운데 카산드라 크로싱(Cassandra Crosing)이라는 영화가 있다. 어느 연구소 창고에 안전하게 보관돼 있는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가 우연한 사고로 외부에 노출되는 끔찍한 경우를 연상케 한다.

영화 ‘카산드라 크로싱’이 현실화 될 수도 있어

1970년대 상영된 스릴러 ‘카산드라 크로싱’은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치명적인 세균이 노출돼 발생한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 건강기구에 세 명의 테러리스트가 침입한다. 치명적인 세균이 보관돼 있는 출입금지 구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한 명은 사살된다. 그러나 총격전으로 세균 보관유리병이 깨진다. 전염성 강한 치명적인 병균에 노출된 한 명이 그 곳을 빠져 나와 기차에 탑승한다.

이 기차는 1천여 명의 승객을 태운 대륙종단 초특급 열차다. 스위스를 출발해서 종착역인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기차다.

이로 인해 미 국방부 정보국에 비상이 걸린다. 맥켄지 대령(버트 랭카스터 역)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미국의 가공할 세균 개발 실험이 알려지면 엄청난 국제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그의 임무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세균이 퍼지는 것을 막는 동시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하는 것.

맥켄지와의 무선 연락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세균학자 챔버레인 박사(리차드 해리스 역)은 그 기차에 탄 수많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맥켄지에게 협조한다.

세균에 감염된 환자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열차 안의 승객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하고 기차는 원래 목적지가 아니라 격리 시설이 있다는 야노프로 선로(線路)를 바꾼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려면 ‘카산드라 크로싱’이라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나치 히틀러 이후 폐기된 다리다. 그래서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미 오래 전에 폐쇄된 철교(鐵橋)로 그 다리를 건너가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안 챔버레인 박사는 맥켄지가 열차 전체를 생매장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공할만한 생물학 무기

세균전은 화학전과 함께 원자폭탄의 방사능전을 능가하는 참혹한 전쟁을 야기시킬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보도는 바이오 안보(bio-security)라는 말을 새롭게 등장시켰다. CDC(미국 국립질병통제센터) 실험실에서 재생된 독감 바이러스가 고의 또는 실수로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과 테러리스트가 이 바이러스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사실 그 동안 계속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 사스(SARS) 바이러스가 2003년과 2004년 2년간 모두 3차례에 걸쳐 싱가포르와 중국 실험실에서 유출됐다. 그리고 두 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부활시킨 것은 대단한 과학적 업적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안겨줄지도 모를 그 바이러스를 재생한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공방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 이제까지 알려진 가장 가공할 만한 생물학 무기를 생산해 냈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한편 극비에 진행된 스페인 조류독감 바이러스 재생에 대한 논문 공개와 관련해 보안담당기관과 과학계의 쌍두마차인 네이처(Nature)와 사이언스(Science)誌 간에 밀고 당기는 실랑이도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안보문제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테러리스트

일부 세균학자들조차도 논문공개는 얻는 이익보다 위험성이 더 많다고 지적하면서 비공개를 주장했다고 한다. 특히 토벤버거 박사가 연구한 유전자배열을 공개하면 테러그룹이 이 바이러스를 생산할 수 있는 결정적 정보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학술지는 “아는 것이 오히려 덜 위험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보도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의 바이오안보자문위원회(NSABB)는 두 과학잡지에 대해 “연구는 공중보건에 대단히 중요하며 아주 안전하게 진행됐다”는 내용을 꼭 넣어줄 것을 전제로 보도를 허락했다고 한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번 연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성을 보였다가 얼음 속에서 동면하고 있는 재앙을 깨운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독감 바이러스 백신과 약 개발에 희망을 안겨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토벤버거 박사의 경고처럼 안전에 대한 절대적인 보장은 없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젊은이만 좋아한 스페인 독감

스페인 독감은 최근 아시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조류독감과 비슷하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이상하게도 젊은이들의 목숨을 많이 앗아갔다. 당시 이 독감으로 사망한 5천여만 명의 희생자 가운데 70% 이상이 25-35세 사이의 건장한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지난 90여 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의학과 생명과학도 이에 대한 대답을 못 내리고 있다.

세균에 대해 저항력이 가장 강한 시기의 젊은이들이 왜 허약한 노인이나 어린이들보다 사망률이 더 높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그리고 조만간 그 해답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전염병 역사연구가들은 전염병은 1백 년, 또는 2백 년을 주기로 발생해 면역체계 무방비 상태의 인류를 공격한다고 한다. 스페인 독감의 희생자 수가 1차대전의 희생자 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스페인 독감은 어린이도 노약자도 아닌 건강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노렸을까? 모든 질병이 그렇지만 원래 전염병의 희생자는 어린이와 노약자다.

해답을 전쟁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전쟁 중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다. 못 먹어서 영양이 부족하고 위생시설이 좋지 않아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폐렴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스페인 독감은 일반 독감과 달리 폐를 공격해 폐렴을 일으킨다. 치사율이 높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폐렴도 어린이와 노약자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회복도 빠르다.

전쟁에서 해답을 찾는 것은 맞지 않아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환자들이 수용소에서 격리 치료를 받고 있다.

사실 전쟁 중에는 대부분의 나라는 동원체제이기 때문에 최고의 의료진과 의약품도 군에 있었고 특별히 고립된 상황인 경우를 제외하면 민간인들보다 보다 더 나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최신 의학연구는 대부분 대학에서 나온다. 그러나 최신의 의료기술은 군 병원에서 나온다. 특히 육군병원의 의료기술은 대단하다. 워싱턴에 있는 월터 리드 육군병원(Walter Reed Army Medical Center)의 의료기술은 명성이 자자하다. 학문적 연구는 대학의 몫이지만 기술은 단연 군 병원의 몫이다.

그래서 열악한 환경이나 의료시설 부족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미국은 1차 대전 참전국이지만 본토에는 아무런 전쟁이 없었다. 당시 미국은 68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감염자의 3분의 1이다. 그러나 어린이나 노인들보다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이 죽었다.

당시 이렇다 할 정보전달 체계가 없었고 1차 대전이 막 끝날 무렵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사망한 젊은이들까지 독감 희생자에 포함됐을 거라는 의문은 있다. 어쨌든 통계수치를 보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면역체계 부족’도 설득력 없어

다른 주장도 있다. 병력(病歷)은 저항력을 키운다. 노인들은 병약하지만 독감을 수십 차례 겪으면서 면역 능력이 생겼고 젊은이들은 독감에 별로 걸린 적이 없기 때문에 면역능력이 부족했다는 주장이다.

의학적으로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젊은이들과 생활을 함께 한 노인들의 면역능력이 나이가 30년 정도 많다고 해서 특별히 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어쨌든 이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진화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등 생물인 바이러스의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아마 몇 초 간격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화하고 있는 수많은 바이러스 가운데는 젊은이만 공격하는 바이러스도 생길 수 있다”. –미국 사이언스 위크-

미국의 어느 실험실 유리관 속에는 90여 년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위험천만의 독감 바이러스가 실질적으로 꿈틀대고 있다.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요즘 아시아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지는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거의 일치한다.

※ 다음 칼럼에 계속됩니다.

김형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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