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 "가을 들이 딸네 집보다 낫다"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사계절 가운데 몸과 마음이 가장 넉넉해지는 가을. 선인들의 생활과 정서가 듬뿍 담긴 속담들을 훑어보면 가을에는 역시 풍요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황금들판에 일렁이는 곡식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한껏 여유로워진다.

그래서 "가을 들이 딸네 집보다 낫다" 고 했다.

일손이 모자라는 가을엔 손만 조금 거들면 먹을 거리가 생겨 배가 두둑하게 된다는 뜻. 비슷한 경우로 "가을 들판이 어설픈 친정보다 낫다" 는 말이 있다.

그리고 "가을 비는 떡비요, 겨울비는 술비다" 라는 속담도 있다.

가을철에 비가 오면 곡식이 넉넉하니 떡을 해먹으며 쉬고, 겨울철에 비가 오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논다는 뜻이다.

식욕 또한 왕성해져 "가을에는 손톱 발톱도 다 먹는다" 고 했다.

가을철에 가장 맛있는 음식은 아욱국이었나 보다.

"가을 아욱국은 제 계집 내쫓고 먹었다" "가을 아욱국은 사위만 준다" 고 한다.

계절별로는 "밥은 봄같이 먹고, 국은 여름같이 먹고, 장은 가을같이 먹고, 술은 겨울같이 먹으랬다" 가 재미있다.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마셔야 한다는 지혜로운 '음식미학' 을 보여준다.

농업이 주축이었던 예전에 가을은 일손이 가장 아쉬웠던 계절.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마님도 나섰다" "가을철에는 부지깽이도 저 혼자 뛴다" 는 것. 심지어 "가을 들판에는 송장도 덤빈다" 는 말도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가을 날씨는 예나 지금이나 변덕이 심했던 모양. "가을 날씨 좋은 것과 늙은이 기운 좋은 것은 믿을 수 없다" "가을 날씨와 계집의 마음은 못 믿는다" 고 했다.

더욱이 가을 장마는 농작물에 치명적인 피해를 끼쳐 "가을 장마가 더 무섭다" "가을 장마에 다 된 곡식 썩인다" 고 걱정했다.

그러나 선인들은 가을의 풍요로움에만 취하지 않았다.

워낙 살림살이가 어려웠던 까닭인지 가을 뒤에 잇따를 내년 봄을 준비하는 꼼꼼함도 보였다.

풍성한 가을에 곡식을 절약하고 춘궁기를 넘긴다는 뜻에서 "가을 곡식을 아껴야 봄 양식이 된다" "가을 죽은 봄 양식이다" 고 말했다.

한편 봄이 여성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남성의 계절에 비유됐다.

"가을 바람은 총각바람이고 봄바람은 처녀바람이다" "여자는 오뉴월에 살찌고 남자는 구시월에 살찐다" 는 평범한 표현. "가을 은 무쇠도 뚫는다" "봄 는 쇠젓가락도 끊고,가을 은 쇠판도 뚫는다" 처럼 걸쭉한 육담과 노골적 언사가 옛사람들의 진솔한 생활태도를 드러낸다.

특히 찬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밤엔 님 생각이 간절해져 "장장추야 (長長秋夜)에 님 기다린듯 한다" 고 읊었다.

조선시대 유교적 도덕관.가족관을 드러내는 속담도 있다.

"큰어미 죽으면 풍년 든다" 는 큰어머니 밑에서 잘 얻어먹지 못한 첩의 아들을 빗댔고, "딸은 가을볕에 내보내고 며느리는 봄볕에 내보낸다" 는 딸과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차별대우를 상징한다.

선선한 가을에는 딸을, 따가운 봄에는 며느리를 내보낸다는 것. 그런데 풍족한 가을도 내내 지속될 수는 없을 터. 선인들은 이같은 자연의 철리 (哲理)에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속담 속에 녹였다.

"매화도 한철이고 국화도 한철이다" "가을 곡식은 재촉하지 않는다" 고 했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