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지금 미래를 잃고 있는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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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만약 우리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우리는 미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윈스턴 처칠이 1940년 영국 하원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필자는 이 글을 어떤 국제회의 개최사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8월11일부터 14일까지 서울의 한 호텔에서 모 언론사가 후원한 '제1차 서울밀레니엄회의' 가 열렸고 그 회의는 밀레니엄, 즉 새로운 천년의 예측과 밀레니엄 코리아를 제안하는 자리였다.

어쩌면 매우 중요하고도 주목할만한 모임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앞서 인용한 처칠의 경고 그대로 우리는 지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싸움을 벌이는 중이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잃어버릴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 모임은 물론 우리를 겁주자는 자리가 아니었다.

회의의 초점은 대체로 '다음 세대가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미래를 누리는 것을 가능케 하는' 방안의 모색에 모아졌다.

회의의 주제어도 평화.정의.안정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의 주제와 우리의 현실을 겹그림으로 보면 '제1차 서울밀레니엄회의' 에는 분명 준열한 꾸짖음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2000년을 카운트 다운하고 있다.

세종로 문화체육부 건물 전면의 전광판은 8백50여일 후면 새로운 천년이 시작됨을 알리고 있다.

미국은 77년 카터 행정부가 '글로벌2000' 이라는 대통령보고서를 채택함으로써 진작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유럽 여러 나라도 이미 80년대에 21세기를 준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런데 우리는 1천일 전부터인가 날짜를 세기 시작하면서 '21세기의 준비' 를 외치고 있다.

남들은 이미 그 결과를 보고 있는 마당에 고작 손가락꼽기나 하고 있는가.

필자가 과문한 탓이라면 다행이고, 오늘의 이 혼란이 새 세기를 위한 새 그림짜기의 조정과정이라면 더더욱 다행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작금의 혼란상이 '다음 세대에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미래' 를 물려주기 위한 진통이던가, 아니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의 싸움' 이던가.

지난 1세기는 나름대로 영화도 있었지만 전쟁과 질병.기아.환경오염으로 점철된 세기였다.

전쟁으로 희생된 목숨만 26억명에 달한다.

하지만 우리의 지난 1세기는 더욱 참혹했다.

이제 어느 정도 경제적인 성공은 거두었으나 평화.안정을 바라기엔 아직 요원하다.

따라서 우리의 21세기는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는데 불과한게 아니라 그야말로 밀레니엄 코리아의 기반을 다지는 세기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가.

경제는 알다시피 구조조정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근래 보기드문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남들은 오랜 준비끝에 이미 그 결과를 보고 있는 터에 우리는 이제야 '준비' 운운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말뿐이요, 실제는 외환위기.금융위기가 회자되는 국면에 맞닥뜨려 있다.

정치상황은 더욱 말씀이 아니다.

대선주자들의 경쟁이야 으레 있는 일이니 그렇다치고 집권여당의 요즈음 모습은 실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여당사상 최초로 자유경선을 실천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엊그제인데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해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정당에서 제손으로 뽑은 후보를 저토록 핍박하던가.

과일을 따라고 나무 위에 오르도록 했으면 사다리를 받쳐주진 못할망정 떨어지라고 나무를 흔들어대다니 공당 (公黨) 답지도, 공인 (公人) 답지도 못한 일이다.

저런 정당에 정권을 맡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일이다.

중국은 오는 12일 제15차 당대회를 열어 21세기를 이끌 새 진용을 짠다고 한다.

외신에 따르면 젊은 인물들로 대폭 물갈이할 것이라는 얘기다.

덩샤오핑 (鄧小平) 의 사망 이후 상당한 혼란이 예상되던 중국이 의외로 더 안정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경제면에선 1만여개의 국유기업을 민영화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작업도 병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밀레니엄을 말하는 정치인은 없고 오로지 목전의 자리다툼에 혈안이 돼 있다.

이러고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지도자라고 자부하겠는가.

다시 처칠의 말이 크게 들려온다.

"지금 너희는 미래를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고흥문<전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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