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윈저家의 황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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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다이애나 전왕세자비의 죽음은 영국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1주일의 조문기간중 영국 국민이 보여준 애도는 그녀가 영국인들에게 왕세자비 이상의 존재였음을 확인해준다.

사고 직후 토니 블레어 총리가 다이애나를 '국민의 왕세자비' 라고 지칭한 것도 그같은 국민정서를 나타낸 것이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타키는 다이애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논하는 신문 칼럼에서 20세기말 영국사를 새로 쓰도록 만든 두 여성으로 마거릿 대처와 다이애나를 꼽았다.

대처는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총리로서 영국 정치를 뒤바꾼 '대처혁명' 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다이애나는 영국의 군주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것이 선정 이유다.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대처는 현실적으로 성공을 거둔 반면 다이애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실패를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그녀의 죽음이 비극적이었던 만큼 그녀는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 오래 살아남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지난 95년 한 TV 인터뷰에서 "왕실은 국민과 좀더 가까워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과 함께 어울려 지내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 지적한 적이 있다.

더글러스 허드 전외무장관은 다이애나가 영국 왕실의 존재를 단순히 국가의 '상징' 이 아니라 존재할만한 가치있는 '무엇' 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이애나의 이같은 노력은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좌절됐다.

그뿐 아니라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생활 파탄과 이로 인한 왕실로부터의 냉대와 고립, 세속적 스캔들 등으로 희석돼버리고 급기야 비극적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최근 영국 국민의 왕실에 대한 지지도는 크게 떨어지고 있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비율이 10년전 77%이던 것이 지금은 48%에 불과하며, 절반 정도가 앞으로 50년안에 왕실이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다이애나는 영국 왕실을 살릴 구원의 천사였던 셈이다.

다이애나가 가버리고난 지금 영국 왕실엔 그같은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 없다.

마침내 윈저가 (家)에 황혼이 찾아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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