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높은 산은 돌아가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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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는 이를 일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경험에 의존해 행동하려 한다. 대통령은 성공한 CEO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때의 방식과 경험에 의존하기 쉽다. 그때는 부하들을 독려해 맡겨진 사업을 제 시간에 끝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수행해야 할 나랏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모든 일이 뿌리가 깊고, 이해관계가 복잡하며, 사람들의 심성·이념·문화·관습 등이 얽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순한 일은 직접적인 접근으로 결과를 쉽게 빨리 낼 수 있지만 복잡한 일은 그렇지 못하다. 나지막한 야산에 도로를 내는 것과 높은 산의 작업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치다. 낮은 언덕이라면 쉽게 길을 낼 수 있지만 험산 준령이라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돌아가기가 싫다면 깊은 골에는 다리를 놓고, 막힌 산은 뚫어야 한다. 다 시간이 걸리고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나랏일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생각해 달려들었다가 장애물에 부딪혀 후퇴하는 양상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신뢰가 떨어진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깨닫는 일도 중요하다. 리더십의 대상이 달라진 것이다. 1960, 70년대의 국민을 신민(臣民)적 국민이었다고 말한다면 지금의 국민들은 시민(市民)적 국민이다. 신민적 국민들에게는 ‘나를 따르라’는 메시지이면 족했으나 시민적 권리를 경험한 국민에게 그런 일방주의는 통하지 않는다. 박정희 시대의 국민과 김대중·노무현 시대까지 겪은 국민들은 그 의식이나 욕구가 달라졌다.국민들의 마음은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채찍과 당근만으로 조종할 수 있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몰아붙이고 끌고 가기보다는 설득하면서 함께 가는 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정부에 대해 독선과 오만, 소통부족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100년 만의 세계적 경제위기에 무슨 한가한 얘기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미국의 오바마도 속도를 내는데 우리가 지척거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속도를 낼 일과 속도로 해결 안 될 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진작을 위한 경제 관련법 개정이나 추경 등은 빨리 처리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야당도 억지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는 방송법 등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여야의 타협은 잘된 일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처리할 때 원칙과 타협이라는 상반된 두 가치 때문에 항상 고민한다. 원칙을 지켜야 할 문제는 원칙을 지키고, 타협을 해야 할 문제는 타협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법을 지키는 문제에서는 원칙을 고수하되, 법을 만드는 문제에서는 타협을 해야 한다. 타협하는 가운데서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규칙이 만들어지고, 일단 만들어진 규칙은 철저하게 지키는 데서 질서가 선다. 이 정부는 이를 거꾸로 해왔다. 원칙을 지켜야 할 때 타협하고, 타협해야 할 때 원칙을 고집한다. 김석기는 살렸어야 하고, 국회는 타협으로 운영해야 한다. 여당을, 국회를 힘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해외로 나간 강성인물까지 다시 불러들이는 일은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한다. 그 10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10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란 단숨에 개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급진좌파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조급한 혁명주의적 사고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정부의 내부뿐 아니라 우파에도 급진좌파식의 조급함이 팽배해 있다. 단기간에 성과가 없다고 이명박 정부를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숨을 길게 가져야 한다. 이제는 1년 단위, 몇 개월 단위가 아니라 남은 4년을 한 단위로 길게 보고 돌아갈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