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날개]박정자씨의 무대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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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옷이 날개' 라는 말이 있다.

돌아보면 누구나 한 순간, 자신을 빛나게 만들었던 '고마운' 옷 한 벌이 없을 수 없다.

그 옷에 담긴 추억이 더욱 귀한 옷 한 벌. 명사들이 간직하고 있는 잊지못할 옷을 소개하는 새 코너를 마련한다.

투박한 갈빛 삼베로 지어낸 치마 저고리. 허리춤에 무명끈을 질끈 동여매, 들려올라간 치맛자락 밑으론 속바지와 짚신이 부끄럼도 모른채 삐죽 드러나 있다.

어머니역으론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연극배우 박정자씨 (56) .그가 95년 가르시아 로르카 원작의 '피의 결혼' 에서 보여준 어머니는 이 옷 한 벌로 고스란히 설명된다.

국악과 마당놀이를 삽입, 한국적인 언어로 풀어낸 이 무대에서 박씨는 졸지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무너져내리는 슬픔을, 동시에 주먹 불끈쥐고 다시 일어서는 어머니의 강인함을 온몸으로 그려냈다.

"연극이 공연되던 여름내내 이 옷을 입은채 관객과 함께 울고 웃었어요. 원작자의 모국인 스페인 원정공연때도 이 차림으로 무대에 섰답니다.

공연 뒷날 '로르카는 배반당하지 않았다' 는 현지신문의 제목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던지…"

삼베옷 한 벌 속에 박씨의 땀과 눈물, 그에 따른 보람과 희열이 한올 한올 배어있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너무 아쉬워서 이 옷을 만들어주신 이병복 선생님 (극단 자유 대표.한국무대미술가협회장) 께 달라고 졸랐지요. 흔쾌히 허락하시더군요. "

대개의 무대의상들은 연극이 끝나면 배우의 손을 떠나 극단 창고에 보관되기 마련. 30여년째 연극을 하는 박씨이지만 스스로 간직한 무대의상은 이 삼베 치마저고리를 포함해 3~4벌에 불과하다.

"나이때문일까요? 꿈처럼 흘러가는 연기생활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듭니다.

앞으론 무대의상 한 벌, 소품 한 점도 꼬박꼬박 모을거예요. "

박씨는 그럴 요량으로 이미 동대문시장을 뒤져 큼지막한 알루미늄 궤짝 두개도 장만해놓았다.

"무대의상은 배우의 무기라고 할 수 있죠. 시대극은 전문가들이 옷을 대주지만 현대물의 경우 제가 일일이 보세상가 찾아다니며 고릅니다. "

올봄 연극가에 바람을 일으켰고 9월말 지방공연에 돌입할 예정인 '그여자, 억척어멈' 에서 박씨는 쉰여섯의 나이에 아찔한 미니스커트 차림을 선보여 "섹시하다" 는 찬사 (?) 를 얻기도 했다.

이 미니스커트 역시 자신의 궤짝속에 보관될 것이라는 게 박씨의 귀띔.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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