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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연습이 필요해” “돈 아낄 수 있어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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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동거커플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TV를 켜면 공중파와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동거를 미화한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다. 동거커플의 알콩달콩한 사랑 얘기가 대부분이다. 동거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도 점차 관대해 지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동거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동거의 현실이 그렇게 낭만적이기만 할까. 중앙 SUNDAY가 동거열풍속 어두운 면을 진단해봤다. 다음은 중앙SUNDAY 기사전문.

결혼율은 수년째 떨어지고, 이혼율은 세계 최고 수준. 그 틈새로 동거 커플은 급증….

전통적 가족윤리가 깨지고 있는 2009년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동거(cohabitation)는 보통 “결혼하지 않고 성관계가 있는 두 남녀가 공동의 주거를 가지고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결혼제도의 기반이 약해질수록 동거는 늘어난다. 서구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동거가 급증하기 시작해 지금은 가족 형태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20~44세 인구의 절반이 동거를 경험했거나 동거 중이라는 조사가 나온 적도 있다. 한국 사회도 이제 이 길목으로 접어든 것일까.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최근 교양과목(‘흔들리는 20대’) 강의 도중 학생들에게 동거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가 의외의 결과에 깜짝 놀랐다.

수강 학생 200여 명 중 20% 정도가 “꼭 한번 동거를 해 보고 싶다”고 응답했고, 약 34%가 “동거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동거는 절대 안 된다”는 학생은 10%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모범생’으로 인식되어 온 서울대생의 절반 이상이 동거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곽 교수는 “서울대생 가운데 자취생을 중심으로 동거문화가 폭넓게 파급돼 있음을 피부로 느끼곤 한다”고 전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8년 사회조사’ 결과는 젊은 층의 인식 변화를 뚜렷이 보여 준다. 조사 결과 “남녀가 결혼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다”는 응답이 열 명 중 네 명꼴로 나타났다. 전국의 15세 이상 남녀 4만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였다.

특히 20~29세에선 이런 응답자가 열 명 중 여섯 명 이상이었다. 15~19세에서도 반 이상이 긍정적이었다. 50세 이상 층에선 20% 정도만 동거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70% 이상이 부정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거에 대한 20대 여성들의 생각이 개방적으로 나타나 눈길을 끈다.

전체 여성 응답자들의 37.6%가 동거에 찬성한 가운데 20~29세 여성들의 찬성률은 55.6%나 됐다. 30대 여성의 반이 넘는 숫자가 동거에 찬성했다.

미혼여성(52.9%)들이나 이혼한 여성(47.8%)들이 동거에 대해 찬성하는 비율이 높았고, 남편과 사별한 여성(24.1%)과 현재 배우자가 있는 여성(35.9%)은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찬성률이 낮았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도 2005년 동거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적이 있다. 20~44세 연령층의 전국 남녀 64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다. 당시 미혼여성의 44.7%가 “남녀가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먼저 살아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에 동의했다. 이번 통계청 조사는 당시의 조사보다 동거를 지지하는 미혼여성의 비율이 더 높아졌음을 보여 준다.

인터넷 동거 카페 1200여 개 우후죽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동거문화는 열풍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현재 네이버나 다음 등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동거를 주제로 한 카페가 1200여 개에 이른다. 회원 수가 몇만 명씩 되는 카페도 여럿 있다.

중앙SUNDAY 인턴기자가 회원 수가 3만 명이 넘는 한 인터넷 동거 카페에 직접 가입해 봤다.

“여자분만 연락 주세요. 하메(하우스 메이트의 준말) 구합니다.”

“강남 방 3개, 즉시 입주하실 여자분만 연락 주세요.” “서울대생임. 동거녀 구합니다.”
동거 파트너를 구하는 글이 이 카페에만 7000건 이상 올라와 있었다. 동거인뿐만 아니라 계약연애나 데이트를 위해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성매매에 악용될 소지가 충분해 보였다. 자기 나이를 ‘19세’라고 밝힌 여성 미성년자들도 눈에 띄었다.

카페에 합성사진을 올린 본지 인턴기자에게는 만남을 청하는 쪽지가 순식간에 수십 개씩 쇄도했다.

자신의 키와 몸무게를 가르쳐 주면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연락처를 남기는 식이었다. 개중엔 자신을 ‘근육질’이라고 소개하며 만남을 청한 사람도 있었다. 이 중 한 사람에게 “동거인을 구하느냐”고 쪽지를 보냈더니 “만나 보고 성격만 맞으면 OK”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혼 전 ‘예비 동거족’ 크게 늘어

카페에서 동거인을 구하는 K씨(27)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K씨는 2006년 여자친구와 함께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가 동거를 경험했다고 한다. 4개월간의 동거 후 귀국한 뒤엔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계속했다. 양가 부모님들에게도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해외연수 중일 때는 각기 자기 공부를 하느라 충돌이 적었지만 한국에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마찰이 잦았다. 결국 2개월 뒤 둘은 이별을 선택하게 됐다.

K씨는 그래도 동거를 선택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서로 방심하고 있을 때의 진짜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K씨는 “앞으로 다른 배우자감을 만나게 되더라도 상대방만 괜찮다면 동거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군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P씨는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학교에 다니던 지방 출신의 여자친구와 동거를 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는 동거의 좋은 점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꼽았다. 데이트 비용도 아끼고, 자취 비용까지 분담할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몇 달 만에 K씨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와이대 사회학과 이연주 교수는 동거 커플 유형을 ▶결혼 예비 동거 ▶편의 동거 ▶결혼 대안 동거 ▶결혼 대체 동거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예비 동거’는 K씨처럼 결혼 전 동거를 하며 배우자와 서로 잘 맞는지를 확인하려는 경우다. ‘편의 동거’는 P씨와 같이 결혼 등의 장기적인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주로 경제적인 편의를 도모하느라 동거하는 것을 말한다. ‘대안 동거’는 결혼할 여건이 못 돼 차선책으로 동거를 선택하는 경우다. 이혼을 경험한 뒤 자녀 문제 등으로 쉽사리 재혼을 선택하지 못하고 커플 관계로 남게 되는 중년의 동거 유형이 이에 가깝다. ‘대체 동거’는 결혼이 여성을 억압한다든지 남성에게 과다한 부양 의무를 지운다는 이유로 가족제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택하는 동거 유형이다. 최근 젊은 층의 동거는 대개 ‘예비 동거’와 ‘편의 동거’ 쪽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동거 경험자, 이혼 확률 커

과거에는 금기시하던 동거가 늘어나는 이유로 방송의 영향을 꼽는 전문가도 많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박선영 연구위원은 “동거담론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옥탑방 고양이’(MBC)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2003년 방영된 이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들은 한집에서만 거주할 뿐 성관계는 없는 동거관계로 그려졌다.

6년이 지난 지금은 옥탑방 고양이의 아류 격인 TV 프로그램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시즌 6까지 편성된 ‘애완남 키우기 나는 펫’(코미디TV), ‘우리 결혼했어요’(MBC), ‘리얼 시트콤 계약동거’(ETN) 등이 대표적이다.
아름다운 장소와 배경음악, 그리고 조각 같은 미남·미녀들이 등장해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를 키우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동거에 대한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며 달콤한 환상을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거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2007년도 상담을 의뢰한 212명 중 47명(27.2%)이 동거 중인 사람의 폭력 때문에 관계를 끝내고 싶어 했다. 2006년도엔 상담을 의뢰한 여성 208명 중 53명이, 남성 47명 중 2명이 동거 중인 사람의 폭력에 시달렸다.
취재팀이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게시판을 조사한 결과 동거하는 사람의 폭력에 대해 피해를 호소하는 글이 3000여 건에 달했다. 동거남에게 전세금을 떼였다거나 가사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고 호소하는 글도 많았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강력사건으로 피살된 여성의 25.5%가 내연이나 동거남 등에게 살해당한 경우라고 한다.
동거 커플은 법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박선영 연구위원은 “유럽 국가들은 ‘등록 파트너십 제도’를 운영하면서 동거 커플에게도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각종 제도가 이른바 ‘정상 가족’을 모델로 설계됐기 때문에 동거 커플은 법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동거 커플은 소득공제나 국민연금·건강보험 같은 사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차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동거한 사람이 사망하면 임대주택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상대방에 대해 재산분할청구와 손해배상청구도 하지 못함은 물론이다.

“살다가 이혼하기 싫어 미리 동거를 경험한 뒤 결혼한다”는 동거족의 생각은 타당한 것일까.

이연주 교수에 따르면 “‘결혼 예비 동거’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결혼 전에 동거를 경험한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이혼할 확률이 더 높았다”고 한다.

강민석 기자·김은화 인턴기자 ms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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