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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무역역조와 오타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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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일본은 세계 최초·최고라는 말을 대단히 좋아한다.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도쿄 신주쿠의 집 근처 라면 집에도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일본에서 가장 면발이 가는 라면집’. 처음엔 ‘최초·최고 타령’이라고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의 저력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됐다. 일본에는 그 흔한 라면도 가게마다 특성을 살린다. 곁들이는 야채를 달리하고 국물 맛을 차별화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면발의 굵기라도 내세우는 것이다.

최초·최고가 되려면 한 우물을 파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일본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열심히 하겠다’는 뜻의 잇쇼겐메(一所懸命)는 이런 장인 정신을 압축하고 있다. 한자리에서 목숨 걸고 끝장을 보겠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특정 분야의 광(狂)이나 전문가가 되면 ‘오타쿠(御宅)’라는 별칭을 얻는다. 자기 분야에만 몰두한다는 의미의 이런 ‘오타쿠 인간’은 일본에서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전설이 된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이 소개한 후루노(古野) 형제들도 오타쿠들이었다. 이들 형제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 해안가의 작은 전기 상점을 경영했다. 당시 어업은 경험과 육감으로 하는 직업이었다. 어획량은 많지 않았고, 생선값도 비쌌다. 어선에 전기 설비를 해주던 이들 형제의 장사도 신통할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품이 올라오는 곳엔 반드시 물고기가 있다”는 단골 고객의 말이 형제의 뇌리를 자극했다. “물고기를 찾아내는 장비를 만들어내자”고.

그러나 형제의 시도는 무모했다. 옛 일본 해군도 해저 지형 탐지기를 토대로 잠수함 탐지 장비 개발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을 탐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래도 밤낮없이 매달린 끝에 초음파탐지기를 만들었지만 그물에는 해파리 떼만 잔뜩 걸려들었다. 사기꾼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형제는 파도의 저항이나 빛의 분산을 줄여야 정밀도가 높아진다며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는 방법도 동원했다.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런 곡절을 거쳐 1948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어군탐지기는 어업의 혁명을 일으켰다. 후루노 어군탐지기는 현재 세계 150개국이 사용하는 세계 점유율 1위 제품이다. 기술 응용이 확산되면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골다공증 측정기 등 정밀 의료기기 분야에서도 큰손이 됐다. 2011년 7월부터 개시되는 일본 지상파 디지털 방송의 핵심 기술인 기준 주파수 발생기도 후루노가 공급한다.

한국은 후루노 형제와 같은 일본의 오타쿠들이 만들어낸 부품·소재·기계장비의 단골 고객이다. 그 결과 지난해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320억 달러(약 50조원)에 달했다. 하도 답답했던지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도 닌텐도 같은 걸 만들 수 없겠나”라고 말했다. IT 강국이니까 가능하지 않으냐는 의미였을 게다. MB는 일본에 부품·소재 산업 투자를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돌아보면 이런 주문은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지난 30여 년간 되풀이됐다. 그러나 무역역조는 해마다 커졌다.

한국은 일본이 이익만 챙기고 무역역조 해소에는 소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독창적인 기술 개발 없이는 일본 의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1899년 창업할 때 화투를 만들었던 닌텐도가 지금도 살아남아 최첨단 게임기를 만들고 있는 비결은 별다른 게 없다. 다만 “언제나 세상을 놀라게 하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오타쿠 기질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오타쿠들이 득실대는 한 일본은 언제나 첨단 부품·소재를 개발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일본에 어쩌다 기술 협력을 받아도 금세 낡은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역역조는 한국에도 오타쿠들이 넘칠 때 해결될 것이다.

김동호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