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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문학·예술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김영태 VS 이제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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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가을로 들어서는 입구, 비는 흔쾌히 내리지 않았다.

김영태 시인의 구절을 빌리자면 "푸르덩덩한 하늘" 에 엷다란 비의 흔적들만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 깔리는 오후의 날씨 속에서 두 예술가는 오랜만의 상면을 반가와 했다.

이상의 시를 차용한 대학로의 카페 '오감도' 의 분위기는 두 자유혼의 만남의 공간으로 적절했다.

뜻밖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나고 있지 않았다.

한 해 무용공연의 95%를 관람한다는 김영태 시인은 그러니까 대학로 공연장 한 귀퉁이에 정물화처럼 늘 박혀 있었던 것이고, 차고를 개조한 평창동의 작업실 일명 '평창동 살롱' 에서 작가 이제하씨의 시간은 애견 투투와 함께 혹은 투투를 닮은 후배문인들과 함께 낮밤이 뒤바뀐 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예술가의 대화는 그들이 함께 다닌 미술대학 시절, 신촌과 명동의 찻집과 그속의 별과 같은 기인,가인들의 기억들로 유유히 흘러들어 갔다.

40년에 걸친 문학과 예술의 삶. 그 흔적의 터널을 거슬러 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정처없고 하염없이 펼쳐지는 한편의 문화 오디세이였다.

이제하 : 참 오랜만일세. 비슷한 데가 많은지 남들이 자꾸 우리를 한 두름으로 엮어대서 허구헌날 얼굴 맞대고 사는 줄로 알기까지 하던데, 실제로는 만나본 지도 꽤 됐지?

김영태 : 그럼. 워낙 피차간에 매인데 없이 흘러다니다 보니 말이야. 마주하니 대뜸 홍익대 다니던 시절부터 생각나는군. 그 논밭 진창길 말야. 와우산을 걸어서 넘어다녔는데 비라도 오면 오도가도 못했고, 간신히 버스라도 타면 절반은 당인리에서 장터로 팔려가는 닭.오리 같은게 들어찼지. 차창 밖으로 일제히 머리 내밀고 있는 닭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구.

이 : 그때 미대생들은 바보 아니면 천재밖에 없었지. 평범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어. 미대 작업실 신발장 위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흰소' 라는 그림 생각나던가.

그게 이중섭의 작품이었어. 그 때 눈여겨 챙겨뒀더라면 갑부 되는거였는데. 소련식 망토 루파슈카를 걸치고 다니신 학장 김환기 선생의 모습도 생생하고.

김 : 학교 입구 나무의자에 김환기.최정희.천경자 세분 선생이 종종 함께 앉아 계셨지. 그분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존경심과 동경에 가슴이 벅차서 어쩔 줄 몰라 했지. 아마 지금 대학생들은 그런 감격이 어떤 건지 잘 모를 거야.

이 :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은 수복 후의 폐허에 불어닥친 비장한 낭만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아 가는 때였지. 대신 어딘가 열에 들뜬 듯한, 꿈에 들뜬 듯한 정서가 지배하고 있었어. 난 신촌 하숙집을 나서면 학교보다는 밥도 쫄쫄 굶으면서 명동 갈채다방으로 출근하듯이 걸어서 가고는 했지. 거기엔 늘 문인이 한 30여명씩 앉아 있곤 했는데 김동리.조연현.김구용 선생들이 주역이었지. 하지만 나중에 배우가 된 문학소녀 전계현이라든가 시인 강계순씨등 엄청 이쁜 여류들 모습이 얼마나 신비롭고 황홀하던지 정신이 없었어. 김 : 갈채다방도 그렇지만, 이형은 요새 없어진 이대 앞 빠리다방의 개척자이자 터줏대감 아닌가.

이 : 그런 셈이지. 갈채를 지나 빠리다방에서 한 15년간 눌러 있었지. 그때 서정주 선생 아들 서승해와 방송작가 김기팔, 환속해서 얼마 안된 고은, 지금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는 강위석 등과 신촌바닥을 누비면서 별별 괴팍한 기행을 다하고 다녔지. 우린 그때 한없이 처절하고 절박해서 그런건데, 후배들이 그걸 낭만이었다고 부르더군. 하긴 밥 굶고 다니기가 예사였지만 한번도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더랬지. 김 : 이형과 나는 문단 데뷔하고 동인지 활동하면서 좀 갈라졌지. 이형이 60년대 사화집 동인을 했고, 난 현대시 동인을 했으니까. 조선일보 뒤에 있는 유성다방이나 아리스다방이 나의 거점이었어. 김종삼 시인이 모자 쓰고 앉아 있고 김수영.전봉건 시인도 늘 보였고 전위적이고 전설적인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류시인 김하림 씨도 날렸지.

이 : 난 그때나 지금이나 김형에게 참 신기하게 여겨지는게 어쩌면 그렇게 서구의 고급 문화예술에 대해 놀라운 레이다망을 가졌나 하는 점이야. 하여간 아무도 모르는 해외 전위사조를 얘기하고 나면 조금 지나 그게 우리나라를 휩쓸곤 했거든. 연극평론에서 무용으로 넘어가기까지 김형은 누구보다 먼저 앞질러 나아갔지. 난 그저 그때그때 생계를 해결하느라 시키는대로 도배하라면 하고 구들장 놓으라면 놓는 식으로 글 쓰며 예술하며 살아왔어. 가난과 나그네 설움 식의 떠돌이 체질이 나를 지배한 거지. 머리로는 예술을 열망하고 발은 보금자리를 못찾아 방황하는 거였는데 그 조화되지 않는 생활 속에서 삶은 늘 대합실과도 같았어. 김 : 나는 그런 점에선 현실의 삶을 산 셈이지. 잠시 잡지 만들다가 은행에 들어가 90년까지 20여년을 근무했으니까. 그 안에서 작품 쓰고 퇴근시간이면 총알같이 나와 무용공연장을 찾아가는 나는 완전히 이방인이었지. 물론 일반적인 은행업무를 한건 아니지만 헝클어진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는 별종을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봤겠어.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작년에 회갑이라고 무용가들이 도와서 69년부터의 내 무용평론 자료를 450쪽의 책으로 엮어냈는데 사람들이 놀라더군. 어찌 그리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수집해 두었냐고 말이야. 순전히 콤플렉스 때문이야. 무어라고 할 수 없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끝없이 모으고 정리하고 다듬고…. 그것도 역사가 되는지 내 평생의 라이브러리와 소장품이 상명대학에 '김영태 춤 자료관' 이라고해서 설치된다네.

이 : 고등학교 때 내가 마산에서 보낸 편지.엽서까지 다 정리해 놓은 걸 보면 이형의 자료수집벽은 정말 놀랍네. 그런 점에선 나는 정반대지.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지…. 뒤를 돌아볼 나이가 되어 최근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대중과의 관계일세. 고답적인 방황에서 벗어나와 대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대중과 함께 하는게 최대의 꿈이라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예술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느냐이지. 난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지금의 부박하고 상스러운 대중문화를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겠네. 얼마나 돈이 되는지에만 관심을 갖는 천격의 자본주의 장사논리에 맞장구를 칠 수는 없지. 그러니 어떻게 하면 격을 떨구지 않으면서 대중과 가까워질 수 있는지가 참으로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네.

김 : 내 회갑 자료집의 제목이 '풍경을 춤출 수 있을까' 라네. 문법에 맞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내 평생을 따라다닌 자책감.소외감의 표현일세. 이 세상에 나왔다가 주역은 못하고 내내 구경꾼.칠쟁이 노릇으로 떠돌다 간다는거. 그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올 수는 없었네.

이 : 우리가 여러 장르의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에 관심 갖는 이들이 많더군. 내 경우 시에서 소설로 나아간 것은 20대의 격정기에는 시가 자연스러운 거였고, 30대가 되어 정서도 메마르고 직업 없이 살다보니 아무래도 원고료가 나은 쪽에 치중하게 되더군. 문학하기가 힘들고 지겨워서이기도 했지. 원래 영화를 좋아했던 터라 우연한 계기로 영화칼럼을 시작해 꽤 오랫동안 거기 머물렀지. 무엇보다 생계문제가 컸어. 하지만 영화와 문학은 이야기를 갖는 점에서 본능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고 넘나드는 성격이 있지. 또 미술과 영화는 전위적인 기법과 방법론의 도입이 무척 빠른 반면 문학은 지둔하기 이를데 없는 장르이고. 내가 일찍이 소설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미술을 한 때문이지.

김 : 그런 점에서라면 내가 한 무용평론은 시와 별 갈등없이 조화될 수 있었다네. 발레와 시는 4촌간 아니 형제간이라네. 섬광처럼 번뜩이는 걸 포착한다는 점, 줄거리의 설명이 필요없고 형식의 맥락이 유사하다는 점 등에서 말일세. 뉴욕 타임스의 유명한 무용평론가 안나 키셀코프처럼 세계 무용평론가의 65%가 시인이야. 30편쯤 만든 무용대본 역시 그 자체가 일종의 시인 셈이고. 예술가들 캐리커처 작업을 많이 한거야 사실 원래 전공을 따른 거고. 그나저나 이형은 마음에 안드는 사람 얼굴은 아예 그려주질 않는 고집불통이라서 내가 대신 떠맡아 그려야 했던 일이 참 많았지 않은가.

(함께 웃음)

이 : 어찌됐든 김형과 나의 인생은 아웃사이더처럼 되어 버렸네.

김 : 난 날 때부터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었지. 직장생활을 했지만 늘 주변인이었고 세상에 예속되거나 의식하며 살지는 않았네. 그런 천성을 그저 지속해온 것 뿐이지. 결혼을 하고서도 이십 몇년째 혼자 살고 있고 누구 시상식에 찾아다닌다거나 하지도 못하지. 냉소적인 기질이라지만 할 수 없네. 외톨이처럼 남들은 보지만 전혀 외로울 틈이 없어. 무용공연 보러 다니는 일만으로도 늘 바쁘니까.

이 : 난 40대가 되기 전까지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참 컷었는데 70년대말 가난으로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 문학을 한다는 일 자체가 현실에서는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고. 40대 중반쯤일까 정욕이 묽어질 때가 되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의 다리가 놓여지더군. 골수에 배인 문화병을 어쩌지 못해 삶의 질곡 속에 휘둘리고 가정마저 풍비박산이 나버려 떠돌이처럼 된건데도 이젠 이 신세에 자유와 편안함을 알 것도 같네.

김 : 난 간혹 이형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네.

이 : 하하하. 자네의 예술가적 기질이며 감각, 음악에 대한 조예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거니까 흉이나 하나 봐야겠네. 난 자네의 작품이 좀 시장바닥 순대접시 같은 생활현실로 끌어내려져 왔으면 좋겠네. 피아노와 발레슈즈만 그리지 말고 말일세. 어쨌건 자네의 작품에서는 첨단의 세련미를 느끼게 되지.

이 : 내 작품에서 세련미를 느낀다면 난 이형 예술에서 항상 긴장을 느끼고 있네. 특히 이형의 오랜 화두인 말그림에서 신비가 느껴지네. 들판을 뛰놀아야할 말이 방안의 난로 옆이나 식탁 곁에 있는 모습. 그 우수와 슬픔같은걸 느끼게 하는 수수께끼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그걸 오래도록 궁금해 하고 있는 중일세.

이 : 그게 예술가로서 김형의 혼이요 나의 혼 아니겠는가.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한편으론 편안한 곳에 갇히고픈 상반된 마음. 그래 슬픈 혼들 아닌가.

빗줄기가 후두둑 거리고 바람도 이는구만. 자 이제 또 자리를 옮겨볼까. 다시 어디로 갈꺼나.

대담정리 = 김갑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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