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창고를 확 열어 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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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열려 있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책방에서 책 얘기를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주인 윤성근 씨는 손님이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사진) 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ok76@joonang.co.kr

 ‘이곳은 헌책방입니다. 이곳은 헌책방이 아닙니다.’ 홈피에 실린 소개글부터 헷갈린다.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이 상반되는 개념이 ‘이곳’을 찾는 순간 ‘아하!’라는‘공감의 감탄사’로 새 나온다. ‘이곳’은 서울 응암동에 자리잡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하 이상북)’이다. 방송도 타면서 알음알음 알려져 헌책방으론 이제 꽤나 명소가 됐다.

 언뜻 봐도 헌책(고서)이 자리잡고 있을 뿐 헌(낡은) 책방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단아하게 정돈된 분위기는 북카페를 연상시킨다. 이 이상북의 주인은 윤성근(34)씨. 둥근 안경테에 고수머리로,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을 닮았다는 손님도 있었단다. 어쨌든 첫 인상부터가 철학적으로 보이는 이 사람. 책방에 얽힌 얘기도 범상치 않을 듯하다.

 윤씨는 어릴 때부터 독특했다. 묘하게 아이들이 보는 책보다는 어른이 읽는 수준의 서적이 끌렸다는 것. 그러다보니 자신이 읽은 책이 90%를 넘는 이곳 서가에 어린이가 읽을 만한 책은 찾기 어렵다. 간간이 기증 받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한쪽 구석에 모아놓고 무조건 100원에 ‘사회 환원’한다.

 대학시절 헌책방 아르바이트를 거쳐 졸업 후에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천생 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있는 건 자연스런 결말로 보인다.

 헌책방의 통념과 사뭇 다르다고 말을 건넸다. “전통적인 헌책방은 그것만으로도 매력이 있지만, 원하는 책을 찾기에 좋은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은 책도, 두 겹 세 겹 쌓인 책묘지 안에 있다면 소용없잖아요. 심지어 책이 천장까지 쌓여 바로 눈앞에 있는 책조차 못 뽑아가기도 하죠.”

 이상북은 3000여 권의 책들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 정리해놓았다. 책 진열장도 깔끔하고 테이블과 의자도 있다. 유기농 차를 음미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특히 군데군데자리잡은 큰 테이블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장소임을 슬쩍 암시한다. 이곳 마음의 보물창고는 늘 열려있다. 문턱만 넘어서면 그 다음은 술술 풀린다. 윤씨가 자신의 독서이력을 바탕으로 마땅한 책을 추천해준다. “싼 맛에 헌책방을 찾는 사람은 책을 사고 나면 그만이죠.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곳에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책에 관해 대화하려면 꾸준한 독서가 필수다. 윤씨는 지금도 일주일에 20~30권의 신간을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혹할 때 도 있다. “긴장할 정도로 박식한 손님을 만날때”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이 윤씨는 퍽이나 유쾌하다.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알려진 작가 장지오노는 사실 유럽에서 『지붕 위의 기병』등 기병 시리즈로 더 유명합니다. 상당한 수작인데 국내에는 한 번 나오고 절판돼 잘 알려지지 않았죠. 이런 책을 찾는 손님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어요.” 작가의 연대기, 소설의 배경,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막힘 없는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 번은 조지 오웰의 『1984』를 찾는 손님이 있었다. “마침 가게에 없는 책이고, 일반 서점에서 바로 찾을 수 있다며 돌려보냈죠.” 그 대신 『1985』를 추천했다. 빅 브라더가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패러디 작품이다. 그 손님은 모르던 분야를 소개해줘서 고맙다며 선물을 사들고 다시 가게를 찾아왔다.

 예전에 윤씨는 다 읽은 책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러다 헌책방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5년여에 걸쳐 꾸준히 책을 모았다. 그는 “막상 진열하고 보니 생각만큼 책이 많지는 않지만 책방에서 책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며 미소지었다.

 “이상북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어릴 때부터 루이스 캐럴의 책을 좋아해 여행할 때마다 앨리스 책을 모아 지금은 60~70권쯤 되죠. 이곳에선 책만 팔지 않는다. 때로는 음악공연·전시도 한다.

 ‘이곳은 헌책방입니다. 이곳은 헌책방이 아닙니다’에 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곳은 책을 중심으로 문화를 가꿔가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프리미엄 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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