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인연의 끈을 다시 잇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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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00여년 전 독립운동의 인연이 한 후손에 의해 다시 이어졌다. 그 감회는 인터넷에서 잔잔한 감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인공은 김수희(49) 고령경찰서장. 김 서장은 지난 13일 경찰 내부망에 ‘인연’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겸산 김정기가 홍당 이병호에게 보낸 편지. 선비들은 편지를 보낼 때 같은 내용 한 부를 자신에게 남겨 둔다.


‘…할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내가 100년 전의 옛 선비를 찾아나섰다. 집안에 있는 자료를 찾아보니 이분들의 간찰(편지)이 나왔다. 후손들 한분 한분 연락이 되고….’

그가 조부의 발자취를 찾다가 인연이 닿았던 분들의 후손을 만나고, 그 느낌을 적은 글이다. 이 글은 23일 현재 조회수 1500여 건에 댓글 60여 개가 달렸다.

김 서장의 조부인 겸산 김정기(1885∼1947)는 파리장서사건 서명자로 일본 경찰에 감시를 받았다. 파리장서사건은 1919년 심산 김창숙을 중심으로 전국의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보낸 일이다. 겸산은 이병호·하성재·조규철·성순영·이현규·정인보·이건창·박기현·박장현·문영박(문희갑 전 대구시장의 조부)·이승만(초대 대통령)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한 기록이 문집에 남아 있었다. 김 서장은 지난해 4월부터 후손들을 한분 한분 찾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영남 유학의 맥을 이은 조긍섭의 제자들이 많았다. 또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선비로서 자존을 지키기 위해 시골 궁벽한 곳에서 은둔하거나 해외로 망명한 이들도 있었다.

그는 이후 7∼8명의 후손과 직접 만났다. 그 중 이병호의 막내아들은 70대 후반으로 국내 굴지의 그룹 회장이었다. 그룹 회장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독립 지사의 후손들을 공부시키고 또 자신의 회사에 취직시켜 온 것도 알게 됐다.

그는 회장을 만났다. 김 서장은 “저녁을 먹으며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이라는 말이 생각났다”며 “너무 반갑게 맞아 주어 삼촌·사촌들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에게 회장을 만난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좋아했다. 까닭을 물었더니 회장과 인연이 닿았으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김 서장은 ‘100년 전의 인연은 이런 것이 아닌데…인연에서 배움을 청해야지 도움을 청하면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남겼다.

한 네티즌은 김 서장의 글을 읽고 ‘향기로운 사람 냄새’라 적었고 또 한 네티즌은 ‘후손들께서 다시 모여 도포 자락으로 프랑스 마르세유에 가서 독립만세 퍼포먼스를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고 댓글을 남겼다.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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