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101> 차이어와 위안스카이의 은원<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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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4월 상하이 항구에 도착한 차이어의 영구(靈柩)와 추모 인파. 김명호 제공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황제에 즉위하려 하자 전국이 요동을 쳤다. 차이어(蔡鍔)도 군주제 복귀에 찬성했다는 소문이 돌자 윈난의 군인들 사이에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쌀값이 폭등하고 뭐든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차이어가 쿤밍에 돌아오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차이는 윈난 전역의 지휘관들에게 “군주제 복귀는 국체에 대한 반역이다. 12월 25일 독립을 선포하고 동시에 거병하자”는 친필 서신을 발송했다. 이의가 없었다. 지휘관들을 쿤밍에 소집해 호국군을 결성했다. “중국인의 인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전쟁이다. 다투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며 “권력을 놓고 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선서에 서명을 요구했다.

24일 위안에게 보내는 ‘나는 통곡한다(痛哭陳詞)’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간의 은혜와 보살핌에 감사를 표하며 시세(時勢)와 양심(良心)의 압박으로 공의(公義)와 사정(私情)이 함께할 수 없음을 통탄했다.

위안스카이는 1월 1일 황제에 즉위했다. 차이어는 쓰촨(四川)으로 진군했다. 충칭(重慶)을 거쳐 청두(成都)에 진입한 후 위안에게 “목숨은 살려준다. 당장 퇴위하고 출국해라. 황제 즉위를 공모한 주안회 회원들을 처형해라. 등극대전과 용병에 소요된 비용을 사재와 주안회 회원들의 개인재산을 몰수해 국가에 환급해라. 증손자까지 공민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했다. 국적(國賊)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위안도 대황군(大皇軍) 10만을 편성했다.

차이어가 직접 출전했다는 소식을 접한 황싱(黃興)은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응할 사람들이 많다. 진퇴가 분명하다 보니 권위가 넘친다. 총리건 도독이건 뭔들 감당 못하랴만 안중에도 없으니 그게 문제다”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차이와 대치한 대황군의 지휘관은 “차이어의 말고삐를 잡아보는 게 소원이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워낙 진심이다 보니 좀 모자란 듯한 말이 저절로 나왔다. 호국군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전국에 반제운동(反帝運動)을 불러일으켰다. 3월22일 위안은 퇴위를 선언했다.

위안스카이는 순천시보의 애독자였다. 매일 아침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전 국민이 황제 즉위에 환호하고 차이를 비난한다는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거리에서 파는 만두를 좋아하는 위안의 딸에게 하녀가 사다 준 만두의 포장이 순천시보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를 매도하는 글로 도배가 돼 있었다. 위안이 보던 신문은 장남이 따로 만든 가짜였기 때문이다. 장남을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다음날 퇴위를 선언했고 6월 6일 요독증과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농사나 짓던 진짜 어리숙한 큰형님이 거절하는 바람에 위안은 선영에도 묻히지 못했다.

차이어는 위안이 죽자 호국군을 해체하고 은퇴했다. 위안의 뒤를 이어 총통에 취임한 리위안홍(黎元洪)이 쓰촨성장에 임명했지만 거절했다. 쓰촨성 전체가 들끓자 어쩔 수 없이 부임했다. 들것에 실려 경내에 들어오는 날 성 전역에 국기를 게양했다.

차이는 밤마다 피를 토했다. 일주일 만에 사직하고 도일(渡日)했다. 11월 8일 후쿠오카에서 폐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봄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의 악록서원에 빈소를 설치했다. 1706년 전 35세의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난 주유(周瑜)를 연상케 하는 만장들이 도처에 펄럭였다. 차이어의 생애는 주유보다도 1년이 더 짧았다. 장례는 민국 최초의 국장(國葬)이었다. 공화제를 부활시킨 사람에게 정부가 해 줄 거라곤 그게 고작이었다. 후일 홍군의 아버지 주더는 “훌륭한 스승이며 좋은 친구는 차이어와 마오쩌둥뿐이었다”고 차이어를 회상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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