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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하고, 인기쇼 출연 … 방문국 사로잡은 ‘유세 외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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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미 대선 민주당 유세를 보는 것 같다.” 22일 첫 해외 순방인 아시아 4개국(일본-인도네시아-한국-중국) 방문 일정을 마치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지켜본 이들의 얘기다. 기자가 20일 오후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클린턴 장관 1m 앞에 앉아 라운드 테이블 간담회를 할 때도 생생하게 전달돼 온 느낌이다. 분·초 단위의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즉 표를 잡겠다는 정성과 의지가 넘쳤다. 학자 출신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 군인 출신 콜린 파월 전 장관, 그리고 이전의 직업 외교관 출신 장관들이 보여 주지 못했던 과감한 스타일의 외교다. 수십 년간 남편과 자신의 선거를 치러낸 베테랑 정치인의 역량, 퍼스트 레이디로 세계를 순방하면서 얻은 경험, 그리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권력 분점(Power Sharing)이 있기에 탄생한 클린턴만의 브랜드다.

현장으로 가다
클린턴 장관은 방문국 외교부 장관과 현안을 논의한 뒤 짧게 기자회견을 하는 정도의 공식 일정에서 머물렀던 과거 미 국무장관의 행보를 훌쩍 넘었다. 방문국 국민 속으로 뛰어들어 손을 직접 잡는 감성외교 또는 대중외교(Public Diplomacy)로 지난 8년간 훼손된 미국의 이미지를 복원하려 애썼다. 첫 순방국 일본에서부터 “미국은 듣기를 원한다”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에서 협력 외교로, 하드 외교에서 소프트 또는 스마트 외교로 전환하려는 미국의 의지를 보였다. 전 세계를 표밭으로 삼아 지지를 얻기 위해 현장을 훑고 다니는 선거 후보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클린턴 장관은 통상 중동과 유럽을 첫 순방지로 택하던 미국의 관행을 깨고 아시아를 선택했다. 명지대 김형준(교양학부 정치학과) 교수는 “당면한 경제위기 해결을 위해 최대 개발도상국인 중국과 세계 경제 2위인 일본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아시아를 택한 것도 있지만 미국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고 중동보다 덜 민감한 아시아를 선택해 지지를 확보하면서 힘을 쌓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정치권에서 얘기하는 이른바 ‘산토끼를 잡기 위해 집토끼부터 잡는’ 전략이 반영됐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직접 하는 외교가 너무 즐거워”
20일 서울에서 열렸던 이화여대 타운 홀 미팅에선 2008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의 ‘클린턴 분위기’가 재연된 듯했다. 서울의 젊은 여성들에게 상대방을 공격하고 정책을 따지는 날카로운 모습 아닌 인생 선배이자 상담자로서의 따듯한 모습을 열정적으로 보여 줬다. 청중과 교감하는 모습을 본 CNN 기자는 “마담 세크러터리(Madam Secretary)가 정말 즐기고 있다”고 했다.

클린턴 장관은 기자에게도 “오바마 대통령을 대리해 중요한 이슈들을 논의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했다. 퍼스트 레이디 시절 80여 개국을 순방할 때도 독립 외교활동을 하던 때를 더 즐거워했다.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 미국 선수단을 이끌고 나설 때가 처음으로 독자 외교를 할 때였는데 미국 대통령 대리로 미국을 대표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고 회고했다.

클린턴 장관은 순방하는 4개국 모두 ‘테마’를 달리했다. 현장의 맞춤형 정책을 연상시킨다. 첫 행선지 일본에선 동맹국을 안심시키는 것을 기조로 했고, 동맹의 견고함을 과시했다. 젊은 대학생들과 만나서는 “새 미국 정부는 우방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다”며 오바마 외교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다.

일본은 클린턴이 퍼스트 레이디가 된 뒤 처음으로 방문(93년)한 나라다. 클린턴은 이후 미치코 왕비와의 우정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번에도 미치코 왕비와의 만남은 클린턴 장관의 중요 일정의 하나였다. 일본 왕실이 국가 수반이 아닌 국무장관을 만난 예는 드물다.

17일 미치코 왕비는 문 앞에까지 나와 클린턴 장관을 환대했다. 한 외교관은 “클린턴 장관은 일본에서 왕실이 갖는 의미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어린 시절을 보낸 인도네시아에서 클린턴이 보여 준 모습은 파격적이었다. 10대에게 인기 있는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해 젊은 연예인들과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인도네시아어로 ‘굉장한 쇼’라는 뜻의 ‘다시야트 쇼’에 출연한 클린턴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내가 노래하면 이 방에 있는 사람이 모두 다 나갈 것”이라며 좌중을 웃겼다.

그는 자카르타의 빈민촌 지역을 방문해 재활용품으로 가방을 만드는 여성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뉴욕 양키스 야구팀의 모자를 쓴 남성에겐 “I love your hat(그 모자 좋네요)”라고 하기도 했다. 클린턴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평화봉사단을 재파견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아시아 先방문은 ‘집토끼 관리’ 전략
클린턴 장관은 마지막 방문지인 중국에서 양제츠 외교부장과 회담한 뒤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 다이빙궈 국무위원 등 수뇌부를 만났다. 경제위기 해결을 위한 협력과 기후변화, 북핵 문제, 이란·파키스탄 문제 등을 두루 논의했다. 양 부장은 “세계 최대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인 두 나라가 21세기 들어 일련의 심각하고 긴급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며 “양국이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고 관계를 한 차원 더 격상시킬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클린턴 장관이 순방 출발 전 언급한 대화 채널의 격상 논의가 진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장관은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전 수행 기자들에게 “중국과 인권 문제, 대만·티베트 문제를 다루겠지만 이것이 다른 현안을 합의하는 데 방해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인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오바마 정부가 부시 정부 때보다 중국의 인권 문제를 더 압박할 것이란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와 기후변화, 이란 문제 등 당면한 미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감한 이슈엔 낮은 자세로 접근하겠다는 실리적 태도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클린턴은 강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특히 전임 장관들이라면 피했을 북한의 정권 승계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했다. 논란이 되자 그는 “외교적 프로토콜을 깬 것이 아니다. 나의 대북 정책 리뷰에 들어가야 할 중요한 요소”라고 일축했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 뒤 북한에 “남한과의 대화 없이 미국과 관계 진전은 어렵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신경 쓰는 ‘통미봉남’(通美封南) 문제에 명쾌한 답을 내려준 것이다. 순방국의 가려운 곳은 긁어 주고 상처는 건드리지 않는 접근법이다.

아시아 순방에서 발휘된 클린턴식 외교 스타일에 대한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그녀가 갖고 있는 국제사회에서의 명성과 위상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김형준 교수는 “클린턴 장관의 명성과 저력,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나눠준 권력 덕분에 그의 초반 외교가 먹히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클린턴식 대중 외교에는 소프트한 측면도 있지만 강경한 요소도 있는 만큼 막상 상대국과 국익이 부딪치는 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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