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작은 정부·일방 외교 ‘부시의 유산’ 지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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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9일 취임 후 첫 방문국인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의 한 가게에서 기념품을 사며 고객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오타와 AP=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일주일 전 기업협의회 회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경제를 살리려면 정부의 시장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오바마는 “우리가 현명하고 용감하다면 역경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며 “나는 과거보다 강하고,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자신한다”고 말했다.

20일로 취임 한 달을 맞은 오바마. ‘희망의 담대함(the Audacity of Hope·저서 제목)’으로 숱한 역경을 극복해 온 그는 통치에도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는 취임 이후 경제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동시에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차별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공화당 정권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일단 성공했다. “‘작은 정부, 시장경제’ 원칙만으론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며 정부가 규제를 통해 시장에 개입하는 틀을 만들었다. 그가 경제 살리기의 야심작으로 내놓은 787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법안은 17일 법으로 발효됐다. 법안 처리 과정에서 오바마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하원에선 단 한 명의 공화당 지지표를 얻지 못했지만, 상원에선 수전 콜린스 등 공화당 의원 세 명과 접촉해 우군으로 만들었다. 그 세 표 덕분에 법안은 상원 의결정족수를 넘을 수 있었다.

오바마는 민주당의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면서 부시의 유산을 지워 나가고 있다. 그는 취임 직후 관타나모 테러용의자 수용소와 중앙정보국(CIA) 국외 감옥을 폐쇄한다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집무실 테이블로 올라온 법 가운데 임금차별금지법을 골라 가장 먼저 서명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하는 조치도 곧 취할 방침이다. 모두 부시가 반대했던 것들이다.

부시는 군사력 등 ‘하드 파워’를 앞세운 일방외교를 추구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국제사회와의 대화를 통해 동의와 협력을 이끌어 내는 힘, 즉 ‘소프트 파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첫 기자회견에서 “이란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수개월 안에 직접 대화를 시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언론 가운데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 위성채널 알아라비야와 처음으로 인터뷰하면서 “미국은 무슬림의 적이 아니다. 미국은 실수도 했으며 완벽하지 않다”며 무슬림 세계에 손을 내밀었다. 부시 땐 상상하기 어려운 태도를 보인 것이다.

안으론 정치의 당파성과 경제위기 극복, 밖으론 국제사회의 신뢰 회복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바마는 한 달 동안 열심히 뛰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패기와 의지, 이상만으론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절감해야 했다. 오바마는 초당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의회를 방문하고, 공화당 지도부를 만났지만 그들의 협조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념 성향과 정책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상무장관직을 받았다가 반납한 공화당 소속 저드 그레그 전 상원의원이 “민주당 측과 생각이 너무 달라 일할 자신이 없다”고 말한 건 당파의 간극이 그만큼 깊고 넓다는 걸 보여 준다.

오바마는 인사에서도 난항을 겪고 있다. 빌 리처드슨 상무장관 내정자, 톰 대슐 보건장관 내정자, 낸시 킬리퍼 백악관 성과관리비서관 내정자 등이 정경유착이나 탈세 의혹 등으로 줄줄이 낙마하면서 오바마의 도덕성과 리더십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 가운데 국제사회도 그의 리더십을 시험하고 있다. 이란은 핵 개발을 중단할 뜻이 없어 보이고, 아프가니스탄전은 악화하는 데다 북한까지 위기를 조성하는 상황에서 소프트 파워 외교가 과연 통할지 미지수다.

여기에다 경제위기가 여전히 오바마를 짓누르고 있다. 그는 경기부양 조치에 이어 금융시장과 주택시장 안정 대책을 내놓았지만 경제가 살아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약발이 먹히지 않을 경우 오바마는 상당한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

그는 지난주 플로리다를 방문한 자리에서 “경제가 좋아진다는 걸 국민이 느끼지 못한다면 미국은 (4년 뒤) 새로운 대통령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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