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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가 고른 딱 한 장의 음반 ② 이광철씨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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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채소 팔아 얼마나 벌기에 이렇게 사느냐는 사람도 있죠.” 이광철씨는 억울하다 했다. “음반 말고는 다 참는 거예요.” 사진 속 그가 든 음반은 베를린 필하모닉 100주년(1987년) 기념 음반. 푸르트벵글러가 1947년 지휘한 베토벤 ‘운명’도 들어 있다. [김상선 기자]


 “카라얀에 비해 푸르트벵글러는 주술적인 지휘자죠. 토스카니니는 즉물적이고….” 이광철(51)씨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아휴, 이렇게 지휘자를 단순 비교하면 안 되는데.” 고민하더니 이내 얼굴을 펴며 웃었다. “난 뭐…, 야채장수니까 괜찮겠죠?”

그는 채소 도매상 사장. 매일 새벽 3시 출근한다. 오전 9시 물건이 들어오기까지 중요한 판매 금액을 결정하고 송금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이씨의 일과다. 10여 년 전부터는 직원을 두고 일하고 있어 여유롭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이 그의 퇴근 시간이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 2층 집에 돌아오면 1층 공간을 도배하다시피 한 2만3000여 장의 음반이 이씨를 맞이한다. 밤까지 이어지는 음악 감상이 시작되는 때다.

◆‘운명’과의 인연=이광철씨가 지금 보유한, 사람 키 넘는 스피커와 화려한 시스템 대신 20년 전에는 작고 간단한 오디오가 있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때였다. “처음에는 집에 생활비도 못 가져다줬어요. 비싼 오디오는 아니었지만, 아내 볼 면목이 없었죠.” 레드 제플린·에릭 클랩턴·양병집 등 500여 장의 LP를 돌리던 기계를, 그는 헐값에 팔았다. “두어달 뒤 아내가 말도 없이 작은 오디오를 다시 사왔어요. 저 힘내라고 배려한 거죠. 밥 먹을 돈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어디서 돈이 났을까요.”

이 새 기계에 처음 걸렸던 음반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이었다. 네 개의 음으로 된 유명한 첫 소절은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이 그의 인생에 이리 깊숙이 들어올 줄은 당시엔 몰랐다고 한다. “어디선가 한 줄의 글을 봤어요. ‘이 교향곡 첫 소절은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였죠.” 호기심이 생긴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지휘자 카라얀의 연주로 5번을 듣기 시작했다.

“그냥 무덤덤했어요.” 첫 인상이다. 작품의 매력이 보인 건 몇 달 후 다시 한번 들었을 때였다. “날 지탱해줄 수 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개척 분야를 헤쳐가는 의지가 담긴 음악은 들을 때마다 새로운 힘을 줬죠.” 독일 지휘자 푸르트벵글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그에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결정하는 힘을 줬다고 한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푸르트벵글러의 ‘운명’을 들었죠.” 교향곡 5번이 들어있는 음반만 50여 장을 모았고, 베토벤의 나머지 8개 교향곡 앨범은 100여 장이 됐다. 힘들던 사업도 점차 자리를 잡았다.

◆음악과 함께 자라나다=음반 목록을 불린 것은 이광철씨의 남다른 호기심이다. “동네 음반 가게를 지나다 들리는 멜로디가 좋으면 어떤 음악인지 알아내고, 음반을 연주자별로 모았어요.” 이렇게 해서 그의 음반은 베토벤 ‘운명’ 교향곡에서 독주곡·실내악곡·성악곡으로 넓어졌다.

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타고난 것이다. “경찰이셨던 아버지는 클래식 매니어였어요.” 아버지의 등 너머로 조금씩 들었던 음악은 그에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사실 저는 그때 김민기와 한대수를 들었죠. 아버지 몰래요. 돌아가신 후에야 베토벤 ‘운명’으로 클래식을 물려받은 거죠.” 지금은 모은 음반의 85% 정도가 클래식 LP다. CD는 LP로 나오지 않은 음반의 경우에만 구한다.

새벽에 출근해 오전에 퇴근하는 일상은 그에게 행복이다. 음악 들을 시간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은 몰라요. 그저 음악 좋아하는 채소장수로서 듣는 거예요”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그는 사실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형식을 분석하려 웬만한 이론서는 다 봤던 내공이 있다. 이씨는 이를 “내 인생에 힘을 줬던 음악 작품에 대한 예의”라고 설명한다.  

김호정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 이광철씨가 말하는 이 음반

베토벤 : 교향곡 5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도이치 그라모폰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지휘하는 5번 교향곡은 각 소절이 꿈틀댄다. 역동적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듯도 하다. “넌 누구인가, 지금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는 이처럼 듣는 사람과 순간의 교감을 중시한다. 연주 현장의 분위기와 음악을 절묘하게 맞추고 듣는 이와 베토벤을 이어주는 것이다. 이 연주 방식은 ‘허용 범위 내에서의 재해석’이라고 부를 만하다. 호흡을 길게 끌고, 선율을 힘있게 강조하는 것이 푸르트벵글러의 특기다. 열 종류가 넘는 푸르트벵글러의 ‘운명’ 녹음 중 ‘베를린 필 복귀 기념’으로 불리는 1947년 것(사진)을 추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에 회부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지휘자의 흥분이 드러난다.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마지막 악장은 코다(악곡 마무리 부분)까지 숨 한 번 쉬지 않고 몰아간다. 적어도 라이브 앨범에 있어, 20세기에 푸르트벵글러를 따라올 지휘자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음반 고수’ 따라잡기 이렇게

① CF와 영화 등에서 들려오는 음악 중 끌리는 작품을 발견한다.
② 가장 유명한 연주자의 녹음으로 시작해 범위를 넓힌다.
③ 음반 정리대에 ‘좋은 음악 칸’과 ‘싫은 음악 칸’을 만들어 따로 보관한다.
④ 두 칸을 비교하면 자신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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