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비판과 질책만이 아닌 서로 존중하는 풍토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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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1월 '컨벤션사업의 변화와 미래' 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가 미국 텍사스주의 샌안토니오에서 열렸다.

첫날 전 미합참의장을 지낸 콜린 파월 장군이 기조연설자로 등단하자 모든 사람들이 열광적인 기립박수로 예우를 해주었다.

그가 유명인이긴 하지만 한국인인 필자는 특별히 기립박수룰 보낼 정도의 존경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대부분인지라 예의상 뒤늦게 일어나 박수를 치다가 앉았는데 그 타이밍도 필자가 가장 빨라 다소 거북했다.

콜린 파월은 유머감각이 뛰어난 달변가였고 그의 연설이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양시킬만한 대목에 이르면 3천명의 청중은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로 화답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도 한국사람인 필자는 감상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이 일어설 필요를 느끼진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복되는 그들의 기립박수 속에서 '나는 왜 기립박수를 치지 못하는가' 하는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의 교육과 문화적 환경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국내에서라면 콜린 파월보다 더한 민간경력의 기조연설자가 등단했을 경우라도 여간해서 기립박수를 치지 않는다.

대통령이 국회나 자기 소속당 전당대회에 등장하는 경우 마지 못해 격식을 갖추는 수준의 박수 이외에는 진실한 기립박수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관제박수' 에 길들여지면서 박수다운 박수를 교육받지 못한 탓이다.

박수의 상징성, 그것은 존경의 표시고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나도 너만큼은 할 수 있다' 는 식의 지기 싫어하는 오기를 누구나 어느 만큼은 갖고 있다고 본다.

'나도 남한테 꿀릴게 없다' 는 자존심은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탄력을 주긴 하지만 대부분 그 탄력성이 지나쳐 남을 인정하기보다 심정적으로 무시하거나 깔보면서 서로에게 상처만 주곤 한다.

대선경쟁이 가열되고 있지만 세기적 전환기 속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경외할 만한 지도자나 어른이 없다' 는 자조는 그간 우리 스스로가 모든 분야에서 남을 존중할줄 아는 덕과 여유를 적극적으로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못한 업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남이 잘못한 점을 비판.질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한 점을 아낌없이 인정해주고 박수 쳐주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를 아껴주면서 서로가 높아질 수 있는 사회문화적 풍토를 조성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본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만 한국인이 세계화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김용관 용인대 관광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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