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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은 낙타였다‥거인 김수환의 삶

중앙일보

입력

16일 오후 6시12분께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87)은 1922년 6월3일 대구 가톨릭 집안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돈독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가 아들을 추기경으로 키웠다. 세례명은 ‘스테파노’다. 초등학교 5년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형 동환과 함께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일본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44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김 추기경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됐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에 복학,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46년 귀국 후에도 서울 성신대(현 가톨릭대)로 편입해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됐다.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성당(현 목성동 주교좌성당)이다.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경북 김천성당(현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 겸 성의 중·고등학교 장, 교구 평의원 등을 거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56년 독일 뮌스턴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64년 귀국해서는 가톨릭 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이 됐다. 66년 44세의 나이로 초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됐다.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김 추기경은 67년 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자 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1년 뒤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당시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취임 일성은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봉사하는 교회’,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핍박받고 가난한 이웃에게 애정을 쏟았다. 독재와 불평등이 극에 달할 때마다 직언을 했고, 역사의 흐름은 제 줄기를 찾았다. 서울대교구장으로 30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2차례 역임했다. 주교회의 산하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고, 75년에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70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준비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서강대, 고려대, 연세대, 미국 노트르담대, 일본 상지대, 미국 시튼힐대, 타이완 후젠가톨릭대, 필리핀 아테네오대 등에서 명예 문학·법학·철학·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제13회 성균관대 심산상(2000), 제2회 인제대 인제인성대상(2000), 독일 대십자공로훈장(2001), 칠레 베르나르도오히긴스 대십자훈장(2002) 등을 수훈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얼굴은 낙타상이다. 대신 지고 가야 할 짐이 몹시 많은 성직자의 관상이다. 성철(1911~1993) 큰스님은 코끼리상이다. 이유는 같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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