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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도 못 돌아가는 장사·챔피언들의 굴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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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씨름선수도, 권투선수도 이종격투기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최홍만도, 추성훈도 흔들리고 있다. 중앙SUNDAY가 장사와 챔피언들의 굴욕을 들여다봤다. 다음은 기사 전문.

이태현(오른쪽)이 2006년 격투기 데뷔전에서 히카르도 모라이스의 펀치에 뒷걸음질치고 있다. 작은 사진은 경기 후 상처를 가리려는 이태현의 모습.

이태현(33)은 지난달 27일 서울 설날장사씨름대회 백호-청룡 통합장사 4~5품 결정전(8강)에서 맥없이 졌다. 모래에 긁힌 이마엔 상처가 났다. 그래도 그는 “내 이름을 불러준 팬들의 응원 덕분에 신났다”며 웃었다. 이날 경기는 그의 씨름 복귀전이었다.

이태현은 2006년 민속씨름을 떠나 그해 9월 종합격투기 프라이드 데뷔전을 치렀다. 마른 장작 같았던 히카르도 모라이스(42·브라질)는 쉽게 이길 것으로 믿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얼굴이 심하게 찢어져 급한 나머지 마취할 겨를도 없이 상처를 꿰매야 했다. 왕년의 천하장사는 얼굴보다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입었다.

모래판을 떠나기 전 이태현은 이만기(인제대 교수)와 함께 가장 많이 백두장사(18회)에 올랐고, 역대 최다승(472승)을 기록했다. 그만한 거물이기에 돌아와 비빌 언덕이 있었다. 모래에 긁힌 상처쯤 이젠 웃어넘길 수 있다. 이종격투기로 전향했던 다른 선수들은 링에서 살아남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계 부닥친 최홍만·추성훈
최홍만(28)이 2005년 입식타격기 K-1으로 진출해 성공하는 듯하자 씨름 선수들의 이종격투기 전향이 잇따랐다. 이태현의 프라이드 도전에 이어 김영현(33)이 2007년 K-1에 데뷔했다. 2000년대 모래판을 군웅할거했던 이들 3명 외에도 김동욱(32)·김경석(28)·신현표(31)도 K-1으로 스카우트됐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장사는 최홍만이 유일하다. 김영현은 지난해 7월 K-1 아시아그랑프리 4강전에서 루슬란 카라예프(26·러시아)에게 1라운드 15초 만에 TKO패했다. 강펀치를 맞은 김영현의 코뼈는 처참하게 주저앉았다. 이후 김영현은 코뼈 재건 수술을 받고 훈련을 재개했지만 링 복귀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김동욱·김경석·신현표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사실상 은퇴했다.

복서들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다. K-1 맥스급(MAX급, 체중 70㎏ 이하)에 진출한 복싱 세계챔피언 출신 최용수(36)와 지인진(35)은 1년 넘도록 출전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세계권투연맹(WBA) 수퍼페더급 챔피언 출신 최용수는 2006년 K-1에 데뷔해 3연승을 거뒀지만 2007년 12월 동급 최강자 마사토(29·일본)를 맞아 3라운드에 기권패했다.

세계복싱평의회(WBC) 페더급 챔피언 벨트를 반납하고 K-1으로 전향한 지인진은 지난해 3월 데뷔전 승리 후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경기 내용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인진은 최근 복싱체육관을 열어 복싱 지도자로 변신했다.

한국권투위원회 관계자는 “K-1과의 계약문제만 아니면 이들을 데려오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낮다. K-1 주최사(FEG)의 한국지사 정연수 대표는 “최용수와 지인진의 공백이 길지만 은퇴는 아니다. 다음 대회(3월 21일 아시아MAX)에 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그러나 실권을 쥐고 있는 FEG 본사는 나이 많은 복싱 챔피언들에 대한 미련을 버린 눈치다. 이들은 한두 차례 링에 오른 뒤 은퇴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공포의 링…“펀치가 두렵다”
이태현은 프라이드 데뷔전에 앞서 자신만만했다. 키 1m96㎝, 몸무게 138㎏의 체격에 힘까지 타고난 그로서는 승리를 기대할 만했다. 이태현은 씨름 기술을 이용해 모라이스를 세 차례나 넘어뜨렸다. 그러나 유리한 포지션에서도 그는 계속 얻어맞기만 했다.

이 경기에서 패한 뒤 이태현은 “내가 위에 있어도 맞는 게 두려웠다. 기술이 너무 부족했다”며 가슴을 쳤다. 이태현은 이후 1년여의 지옥훈련을 견뎌냈다. 이듬해 K-1 드림에서 첫 승리를 거뒀지만 알리스타 오브레임(29·네덜란드)을 만나 1라운드 36초 만에 KO패했다. 천하장사는 “격투기를 하면서 대인기피증이 생겼다”는 말을 남기고 링을 떠났다.

이태현은 “씨름과 격투기는 근본부터 다르다. 링에 서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씨름 후배들은 이종격투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다른 종목 선수가 성공하려면 20대 초반부터 격투기 링에서 잔뼈가 굵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영현도 마찬가지다. 2m17㎝·153㎏의 거구는 분명 위협적이지만 기술과 스피드가 없어 경쟁력을 갖지 못했다. 태권도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박용수(28)도 링에 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박용수는 2007년 9월 K-1 그랑프리 대회 16강전에서 제롬 르 밴너(37·프랑스)의 상대가 결장하자 “내가 태권도의 자존심을 걸고 도전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섰지만 밴너의 펀치 한 방에 쓰러졌다.

2000년대 초반 빠르게 성장한 일본 이종격투기는 다른 종목 간판스타들을 의욕적으로 영입했다. 특히 각 종목 정상에 섰으면서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한국 선수들이 주요 타깃이었다. 씨름 천하장사도, 복싱 챔피언도,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이종격투기가 내민 돈보따리에 항복했다. 그러다 프라이드가 도산하고 K-1마저 자금난을 겪자 ‘간판’만 앞세웠던 선수들이 가장 먼저 무대 뒤로 퇴장하고 있다.

격투기로 출발한 김동현만 희망
한국인 파이터 중에는 성공작도 있다. 최홍만을 비롯해 연예인의 인기를 뛰어넘은 추성훈(34), 그리고 기량을 인정받은 윤동식(37) 등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이들의 입지도 부쩍 줄어들었다. 상징성이 큰 이들의 후퇴는 제2의 최홍만, 제2의 추성훈 탄생을 가로막고 있다.

최홍만은 2007년 9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5연패를 당했다. 상대가 표도르 에밀리아넨코(33·러시아)·미르코 크로캅(35·크로아티아)·바다 하리(25·네덜란드) 등 세계적인 파이터였던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최홍만의 기량이 늘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격투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싸움꾼들은 이렇다 할 기술 없이 2m18㎝·160㎏의 체격을 앞세워 밀어붙이기만 하는 최홍만을 쉽게 농락했다. FEG가 “입식 타격에서 더 이상 발전을 보이지 않는다. 종합격투기로 전환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최홍만은 당분간 누워서도 싸울 수 있는 드림 경기에 나서게 됐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추성훈도 파이터의 이미지를 잃었다. 부산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그는 타격 감각까지 타고나 격투기 전적 12승1패(2무효)를 기록했다. 그러나 추성훈은 지난해 벼락 스타로 떠오른 뒤 강자와 싸우기를 꺼리고 있다. 시바타 가쓰요리(30)·도노오카 마사노리(36·이상 일본) 등 무명선수와 싸우며 전적을 관리했을 뿐이다. 지난해 말 FEG와 계약이 만료됐는데도 광고 출연, 자서전 출판, 도장 설립 등에 바쁘다. ‘파이터’ 추성훈의 진면목을 링에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리스트 윤동식도 지난해 드림에서 2연패를 당하며 주춤했다. 그라운드 기술은 최정상급이지만 타격에선 여전히 약점을 드러냈다. 특화된 힘과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전향 파이터’는 언젠가 기술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닥친다. 한국 선수들 중에는 이 고비를 뛰어넘은 선수가 아직 없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웰라운드 파이터가 살아남는다

미르코 크로캅(35·크로아티아)의 하이킥, 밥 샙(35·미국)의 러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33·브라질)의 주짓수…. 이들은 특화된 격투 기술을 보인다. 한편으로 치우친 파이터는 약점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격투기가 발전할수록 특징이 강한 선수보다는 ‘약점 없는’ 파이터가 득세하는 추세다.

케이블채널 수퍼액션에서 미국 종합격투기 UFC를 중계하는 김남훈 해설위원은 “특별한 기술은 양날의 칼이다. 지금은 웰라운드(Well-round) 파이터의 시대다. 대부분의 챔피언은 특색이 있다기보다는 빈틈이 없다”고 설명했다. M-1 챔피언 표도르 에밀리아넨코(33·러시아)는 타격과 그라운드 기술의 균형을 완벽하게 이뤄낸 파이터다. 프라이드 시절부터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은 이유다. 또 헤비급의 브록 레스너(32·미국), 미들급의 앤더슨 실바(34·브라질), 웰터급의 조르주 생피에르(27·캐나다) 등 UFC 챔피언들도 스타일을 단정하기 어려운 만능 싸움꾼이다. 한국인 중에서는 체계적으로 웰라운드 파이터로 길러진 김동현이 UFC에서 2승1패로 선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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