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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My Life ] “만화는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그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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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호의 만화를 읽는 좋은 방법이 있다. 두 번 읽는 것이다. 1995년 그가 그린 장편 임꺽정(전 20권)을 1회독 했을 때, 나는 그 그림의 어눌한 이미지, 불명확한 선 처리에 다소 불만이 남았다.

‘조선’을 그린 이두호의 만화인생 40년… 전 10권 ‘만화 한국사’ 작업에 몰두할 터

몇 년 후 그 임꺽정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그가 추구하는 ‘조선의 심상(心象)’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흔히 ‘바지 저고리의 혼’이라 명명하는, 거칠고 두루뭉술한, 저 이두호적 만화의 ‘불투명한 세계’에 열광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의 만화에는 단박에 사람의 얼을 빼놓는 날카로운 매혹의 순간이 드물다. 산과 강의 풍광을 음미할 때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를 확보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작품은 유유자적의 마음으로, 멀리서 천천히 감상할 때 진면목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한번 그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당기는 힘이 여간 완고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난 연말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직을 정년 퇴임했다. 그는 명예교수로 1년을 더 강단에 설 예정이다.

아직 그의 대학 연구실엔 그가 평생 그려온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그는 5년 후 완간을 목표로 ‘만화 한국사’ 전 10권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 시절엔 누구나 그랬듯이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렸어요.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만화책 뒷장에 빽빽하게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큰형님 결혼식 때 축사를 쓴 두루마리에도 그림을 그렸어요. ‘며느리 설움’이란 무성영화를 보고 만화로 내용을 되살렸던 기억도 납니다. 5학년 때였죠. 중3 때는 정식으로 ‘피리를 불어라’란 만화책을 출판하기도 했어요.”

이두호는 1943년 경북 고령군 다산면에서 태어났다.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절까지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출중했다. 측량, 목수 등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 탁월했다. 그 손재주를 살려 부친이 뛰어든 또 하나의 세계가 도박이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면서 이두호 일가는 고생의 문에 들어서게 된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만화보다 회화에 열중했다. 장차 화가가 되리라 생각했지, 만화가는 꿈도 꾸지 않았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3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을 때까지도 그는 서양화가로의 입신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고교 시절부터 그는 대구 문예출판사에 취직해 위인전의 삽화 일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 모아둔 돈으로 입학금을 낼 수 있었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그는 오직 생존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구두닦이를 했고, 명동 심지다방 근처에서 밀감을 팔기도 했다.

고구마가 네 개에 10원 하던 시절인데 하루에 두 개씩 먹으며 버텨낸 적도 있다. 초등학교의 환경미화를 도급 받아 생활비를 충당했던 적도 있지만 학비를 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1965년 그는 군에 입대했다. 그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생활고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그의 작품에서 배어 나오는 약하고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짙은 연민은 그런 그의 청년기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홍대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만화를 그렸어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동창생들이 저를 바퀴벌레 취급하더군요. 그런 풍토에 대한 반발심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화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죠. 군 제대 후 결혼했는데, 그때 학교에 복학해서는 도저히 가장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박기정 선생 문하에서 1년 습작기를 거친 다음 ‘소년중앙’ 창간을 계기로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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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년 동안 그는 지독한 갈등에 시달렸다. 만화는 생업이었지, 그가 절실하게 꿈꾸던 세계가 아니었다. 1978년 그는 절친한 동료 한희작씨에게 희한한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화풍이 비슷했던 그에게 2년간 자신의 연재 만화를 대신 그려 달라 부탁한 것이다. 그는 오래 꿈꾸던 세계, 그가 일생을 추구하리라 결심했던 서양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내도 1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챘을 정도예요

그때 철조망도 그리고 망치도 그리고 찌그러진 깡통도 그리고… 나의 설움이 압축된 온갖 대상을 캔버스 위에 그려봤죠. 무서운 가난에 시달리면서 2년 동안 서양화를 그리고 나니까 역설적으로 만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더군요. 한희작과 약속한 2년이 지나면서 다른 연재물은 다 정리하고 성인만화는 ‘바람소리’를, 아동물은 ‘암행어사 허풍대’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둘 다 시대물이었죠.”

그는 학창시절부터 국사, 특히 조선사를 좋아했다. 박기정, 박기당, 김종래 등이 즐겨 그렸던 시대극화의 전통이 끊어져 안타깝기도 했고, 시대물엔 뭔가 비아냥거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거기에는 사회 현실을 에둘러 비판할 수 있는 소재가 가득 차 있었다.

“1987년부터 주간만화에 연재한 ‘덩더꿍’이 그런 작품이죠. 작중 모델은 세조 때 영의정까지 지내고 부귀 영화를 누렸던 홍윤성이었는데, 그는 조선의 역신 중 최악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세조는 끝내 그를 징치하지 못했는데, 최고통치자가 못하면 백성들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이 만화의 메시지였습니다. 주인공 ‘독대’가 홍윤성을 죽일 때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더군요.”

그의 시대극화 중 기념비적인 작품은 김주영의 ‘객주’와 벽초(홍명희)의 ‘임꺽정’일 것이다. ‘객주’는 1988년 김주영씨와 직접 만나 원작료에 대한 협상을 벌였다. 김주영은 당시 신촌의 한 만화출판업자에게 거금 1800만원의 원작료를 제의 받았지만 이두호에겐 단돈 400만원을 받고 만화판권을 넘겼다.

“신촌 출판업자는 만화가를 여럿 동원해 공장 식으로 만들려 했는데 김주영씨는 그 점을 싫어했어요. 단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자기가 필요한 돈이 400만원인데 300만원만 달라는 거예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제가 그냥 400만원을 드리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가 다방 주인에게 메모지 한 장을 달라 하더니 거기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객주의 만화판권을 이두호에게 양도함’이라 써줬던 기억이 납니다.”

벽초의 ‘임꺽정’은 이두호가 오랜 기간 몇 번이고 열독해 온 소설이었고, 언젠가 꼭 그려보리라 마음에 뒀던 작품이었다. 벽초의 소설을 뼈대로 삼았지만 실록에 나타난 임꺽정의 자료도 모조리 섭렵했다. 자료 수집을 위해 임시로 대학원생을 고용하기도 했다. 벽초의 임꺽정은 작품 전체가 연대기 순으로 연결돼 있지 않고 각 편마다 서술방식도 다르다.

만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발상으로 내용을 정리하고 주인공의 캐릭터에도 변화를 줘야 했다. “임꺽정은 고우영씨가 70년대에, 방학기씨가 80년대에, 그리고 제가 90년대에 작품을 만들었죠. 2000년대에 좋은 후배가 나와 새롭게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궁무진한 변용이 가능하죠.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으니까요.”

이두호의 저 유명한 ‘엉덩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만화는 머리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엉덩이로 그린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늘 세뇌하는 그의 지론이다.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 했던 고 김수영 시인의 소위 ‘온몸론’과도 통하고, 만화란 예술이면서 동시에 노동일 수밖에 없는 현실과도 통한다.

만화의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선 엉덩이를 붙이고 한 자리에서 10시간 이상 버틸 수 있는 뚝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두호는 그래서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 ‘여름방학 만화지옥캠프’란 전통을 만들었다. 여름방학 때마다 보통 열흘씩 시골의 폐교를 빌려 만화를 그리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작화 테이블을 1인당 1개씩 설치하고 무더위와 모기떼와 싸우며 만화 그리기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고행엔 이두호 자신도 똑같은 조건으로 참여하므로 학생들은 감히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내가 만화 배울 땐 이랬죠. 작화 테이블 앞에 조그만 창이 있었는데, 한참 그리다 고개를 들어보면 그 창밖에 눈이 내리고, 또 한참을 그리다 보면 꽃도 피고, 장마가 지고, 낙엽 지는 가을이 오더라고요. 그렇게 그리고 그려서 어느 날 작가가 된 것이죠. 요즘 학생들은 만화를 그리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지옥캠프를 그래서 구상했죠. 한번 갔다 오면 학생들 눈빛이 달라지고, 작업에 임하는 진지함이 달라집디다.”

그의 만화세계를 한 번의 인터뷰로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섭렵한 수많은 장르의 만화, 40년 작품세계의 리스트는 셀 수조차 없다. 그 넘칠 듯한 과거의 업적을 뒤로한 채 그의 만화는 요즘도 진보를 거듭한다.

“앞으로 5년은 10권짜리 ‘만화 한국사’에 몰두할 작정입니다. 내가 그 동안 천착했던 조선시대사를 넘어서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작업이죠. 제 엉덩이가 감내해야 할 새로운 도전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선물로 받은 책, ‘이두호의 가라사대’의 속표지에 그는 임꺽정의 초상을 그려줬다. 그는 눈동자의 점을 제일 마지막에 찍었다. 임꺽정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었지만 이두호 만화, 그 거대한 계보를 마감하는 화룡점정은 아직 찍히지 않았다.

한기홍 뉴스위크 한국판 객원기자 / glutton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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