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철거하는데 어디로 갈지 … 임대 아파트 비싸 그림의 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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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정동 판자촌 개미마을이 곧 재개발에 들어간다. 20년간 이곳에 살며 아이 셋을 낳은 배판수씨(55·右)가 둘째 아들과 집으로 가고 있다. 멀리 선수촌 아파트(올림픽 훼미리타운)가 보인다. [박종근 기자]

 ‘주민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게 재개발의 취지다. 그러나 재개발에서 소외되는 원주민이 많다. 보상금으로는 재개발 지역에 다시 입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개발이 가난한 주민을 갈 곳 없게 만든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개발로 인해 살 곳이 사라지는 ‘재개발의 역설’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9일 밤 서울 문정동 훼미리길. 도로를 가운데 두고 한쪽엔 올림픽 훼미리타운(선수촌 아파트), 다른 한쪽엔 판자촌 개미마을이 보였다. 15층 아파트 53개 동이 모여 있는 쪽은 불빛으로 환했다. 반면 97가구가 모여 있는 반대편 판자촌은 어두웠다. 외풍을 막으려 창문에 천과 달력을 덧댔기 때문이다.

개미마을과 선수촌 아파트는 1980년대 같이 생겨났다.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촌을 지었고, 그 지역의 원주민은 반대편 판자촌으로 이주했다. 배판수(55)씨 가족은 이곳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고아 출신인 배씨는 90년 장안동에서 개미마을로 이사 왔다. 당시 그에겐 300만원이 전부였다. 개미마을에선 그 돈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씨는 선수촌 아파트에서 과일 가게를 하며 돈을 모았다. ‘친절한 빨간 조끼 아저씨’로 통했다. 하지만 2000년 대형 마트가 생기며 과일 장사는 타격을 입었다. 8.3㎡(2.5평)의 가게는 2003년 문을 닫았다. 아내가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며 옷 가게를 냈지만 몇 개월 만에 망했다. 배씨는 “벌어놓은 돈을 모두 까먹고 빚만 졌다”고 했다.

2004년 들어 재개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이웃사촌이던 사람이 “비싼 값에 집을 팔아 주겠다”며 외지인과 함께 돌아다녔다. 브로커로 나선 것이다. 채권자가 배씨를 찾아와 “집을 팔아 빚부터 갚으라”고 요구했다.

이듬해 브로커는 4000만원에 집을 팔아 줬다. 빚을 갚으니 남는 돈이 없었다. 그러나 배씨 집의 실제 매매가는 8000만원이었다. 4000만원은 브로커가 챙긴 것이다. 배씨는 이 마을의 14.9㎡(4.5평) 단칸방으로 다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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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하기 어려운 임대료=2007년 재개발 공시가 나왔다. 비싼 값을 치르고 들어온 이주민은 ‘임대아파트 입주권’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아파트 분양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배씨를 포함한 원주민은 입주권이면 충분했다. 이주민과 원주민은 마을 회의도 같이 하지 않았다. 둘로 나눠진 마을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주민들은 집의 크기에 따라 1000만~2000만원의 보상금과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제공받았다. 하지만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선 보증금 4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을 내야 한다. 퀵서비스로 월 70만원을 버는 배씨에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돈이다. 더욱이 배씨는 이미 집을 팔아 보상 대상도 아니다. 일부 주민이 ‘이 지역에 들어설 아파트에 대한 분양권’을 요구하며 반발하는 가운데, 지난해부터 장지동 임대아파트로 이주가 시작됐다.

개미마을에는 ‘송파 꿈나무학교’라는 공부방이 있다. 몇 년 전부터 공부방은 ‘마을 지도 그리기’를 진행했다. 배씨의 둘째 아들 민석(17·가명)이도 참여했다. 가난하지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자는 의미의 행사였다. 도시 개발과 함께 이곳은 곧 철거된다.

공부방 이윤복(44) 교사는 "종교시설도 보상을 받는데 공부방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말했다. 현대식 아파트가 완공돼도, 공부방에서 마을을 그렸던 아이들은 동네로 돌아올 수 없다.

정선언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알려왔습니다▒

 ◆서울 문정동 개미마을 주민 일부는 “원주민 중에도 아파트 분양권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권익위원회가 토지보상법 78조 등에 근거해 ‘주민들이 분양 아파트 공급 대상자에 해당한다’고 권고한 만큼, SH공사 측에 아파트 분양권을 요구하는 것은 합법적이다”고 알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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