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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문화유산>20. 전곡 돌도끼.반구대 바위그림.강화 고인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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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문화라고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에 반대되거나 자연과 격리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태고시대의 문화유산은 대자연 속의 인간존재를 감동적으로 인식시키는 경우도 있다.

전곡리의 돌도끼, 울주의 반구대의 바위그림, 그리고 강화도 부근리의 지석묘 만큼 나에게 감동을 주고 인생의 여정을 바꾼 문화유산은 없었다.

이것들은 찬란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머나먼 과거를 생각케하여 넉넉한 정서적인 공간을 만들어 주었던 문화 유산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다.

시대는 각기 다르지만 이 세가지 모두 돌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이다.

돌은 딱딱하고 차게 느껴지지만 이상스럽게도 자연 그대로이건 또는 가공되었건 간에 사람들에게 많은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이다.

더구나 태고의 사람 손길이 닿은 돌은 머나먼 과거를 보는 시간의 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선사 고고학자에게 돌로 만든 문화유산은 과거로 돌아갈수 있는 유일한 타임머신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애착이 가는 것이다.

◇전곡리 (全谷里) 의 돌도끼 전곡리의 돌도끼는 돌의 예리함이 그대로 살아 있도록 깨뜨려서 만든 구석기시대의 도구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로 알려진 이 돌도끼는 나에게는 남다른 유물이다.

이 돌도끼는 고고학자로서의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아직도 나의 연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삼국시대의 마구 (馬具) 를 연구하여 우리나라 고대문화의 기원을 찾고자 하였지만 전곡리유적 발굴을 맡게 되면서 부터 구석기시대의 돌도끼가 결국 나의 주전공이 되었다.

아시아 최초 서구형 주먹도끼 전곡리의 주먹도끼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서구형 아슐리안형의 주먹 도끼로 세계의 고고학계를 놀라게 하였던 유물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비밀을 캐기 위하여 어떤 해는 키보다 높은 풀을 베고 발굴에 들어가서 눈오는 섣달에 나오기도 하였다.

발굴기간 동안 태양 아래서 이루어지는 붉은 땅과의 씨름은 산중에서 면벽참선하는 것 만큼 지루하고 인내를 요구하는 고고 (苦苦) 학적 작업이었다.

그래도 붉은 토양 속에 하얗게 반짝이는 돌도끼를 발견하는 순간은 그 어느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 전신을 휩싸게 된다.

하이얀 석영암 석기는 발굴하는 순간에서는 차라리 하나의 보석이었다.

발굴된 돌도끼를 잡는 순간에는 구석기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구석기유적 발굴은 엄청난 인내가 요구되지만 태고의 잠을 깨뜨린다는 희열 때문에 그 매력을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돌도끼의 주인은 찾지 못하고 있으니 그 해의 가을에 읊은 어설픈 한시 (漢詩)가 아직도 마음 속에 빙빙 돌고 있다.

"東山紅陽如昨今, 門前白霜鷺過年. 赤土古魂未覺夢, 無心漢灘不知歲. (동산에 붉게 떠오르는 해는 어제 오늘이 같지만, 문앞에 하얀 서리는 해가 기우는 것을 알리네. 붉은 땅 속의 고대인의 혼은 깨어날 줄을 모르고, 무심한 한탄강은 어찌 세월이 흐르는 줄을 알겠는가.

)" ◇울주 대곡리 (大谷里) 반구대 (磐龜臺) 바위그림 거의 20년전 이른 봄날의 황혼녁에 평평한 수직 암벽에 빼곡히 새긴 바위그림을 대하였을 때 그저 아하! 하는 경악의 탄식이 절로 튀어나왔다.

사진과 탁본으로 보기는 하였지만 막상 한적한 산 속에서 눈 앞에 펼쳐진 바위그림은 외계인의 장난같이 낯설고 극적인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이제 바위그림은 반구대 말고도 여러 곳에서 확인 되지만 반구대의 것처럼 많은 그림이 남아 있고 다양한 주제가 포함된 것은 없다.

거북도 있고, 애기 밴 고래가 있는가 하면, 그물에 잡힌 호랑이도 있고, 성기 (性器) 를 세운 남성도 있다.

배를 크게 그린 사슴의 모습, 사람을 태운 배의 모습도 있고,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림도 있다.

이 지역은 바다로 부터 거의 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다.

최근의 지리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왼편에 새겨진 고래들은 아마도 지금으로 부터 약5천년 내지 6천년 전에 바다가 내륙까지 들어왔던 시기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바다가 멀어지게 되면서 오른편에 있는 산짐승들을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주술.교육적성격 함께 내포 이 바위그림은 사냥과 어로작업을 전후하여 당시 사람들이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성격과 교육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며 결국 그들의 자연관을 표현한 것이다.

아무리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많다고 하지만, 선사시대의 생활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유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선사인의 미의식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림 비평에 탁월한 눈을 가졌던 작고 작가 원계홍 화백은 "현대의 예술가도 접근하기 어려운 미적 표현 경지" 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바위그림들은 아무르강 유역 등 시베리아에서 널리 발견된다.

때문에 한반도의 동남부에 있는 이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머난먼 이동행로를 나타내면서 그들의 피 속을 같이 흐르는 자연속의 생활을 표현하는 그 문화적인 정서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지 모를 진한 감동을 울리게 하는 것이다.

◇강화 부근리 (富近里) 의 지석묘 우리나라 선사시대 문화 중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지석묘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밀집되어 나타나고 그 종류도 다양하여 그 자체가 한반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릉 위에 나지막하게 서있는 큼직한 지석묘나, 넓은 들의 중간 곡물의 머리 위로 쑥 올라온 지석묘의 자태는 자연 모습 그대로의 유적이며 초가집이 있는 풍경 속에서 지석묘를 상상하면 그야말로 한국적인 풍경이라고 할 것이다.

남한 최대의 북방식 지석묘 남한에 남아 있는 북방식 지석묘 중에서 가장 큰 것이 강화부근리의 지석묘이다.

솔 밭이 펼쳐진 낮은 구릉에 날아가는 새 모양으로 한 쪽은 낮고 다른 쪽은 높게 비스듬하게 올라 앉은 개석 (蓋石) 을 두개의 지석 (支石) 이 약간 삐딱하게 받치고 있다.

원래는 지석이 4개였을 테지만 지금은 긴 지석 두개만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이 지석묘의 조각적인 멋을 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 개인의 묘지임에 틀림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협동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건축물이다.

부근리 것의 경우도 돌 하나의 무게가 수십톤에 이르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석묘를 두고 추장의 무덤이니 지도자 계급의 무덤이니 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여하간에 지석묘는 상고시대 사람들의 협동의식을 보여주는 유적이자 한국고대문명의 시발점으로서 그 문화사적인 가치가 지대한 것이다.

부근리 지석묘의 길이가 5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이 서해의 황혼에 걸리게 되면 고대인의 모든 기원의 소리가 현세에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이집트문명의 거대한 카르낙 신전의 거석문화보다는 그 규모가 형편없이 작지만 부근리 지석묘는 '자연에 순응하는 문명인' 으로서의 한국 고대인의 멋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게하는 유적인 것이다.

배기동 <한양대 문화연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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