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리먼 시스터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스포츠 세계엔 ‘승자 효과(winner’s effect)’란 게 있다. 남자 선수의 경우 승리를 거두면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히 분비된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아질수록 경기력도 향상되니 한 번 승자가 되면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는 셈이다. 단, 과다 분비된 호르몬이 합리적 판단을 흐려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숏 게임의 천재’ 필 미켈슨의 골프 인생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은 2006년 US오픈 최종 라운드가 꼭 그랬다. 그해 PGA 투어에서 잇따라 2승을 올린 그는 여세를 몰아 이 대회도 집어삼킬 참이었다. 그런데 18번 홀에서 러프에 떨어진 티샷을 그린으로 곧장 올리려다 그만 공을 더 깊은 러프에 빠뜨린다. 욕심에 눈이 멀어 우승컵 대신 ‘메이저 대회 사상 최악의 마무리’란 조롱만 얻고 만다.

이번 금융위기 역시 테스토스테론 과잉이 불러온 참사라는 주장이 일고 있다. 경쟁심과 공격성을 부추기는 테스토스테론에 휘둘려 투자은행가들이 고위험 고수익 파생상품을 앞다퉈 내놨다는 거다. 주식중개인 출신 신경과학자(존 코츠 캐임브리지대 선임연구원)가 한 소리라 더 솔깃하다. 얼마 전 다보스 포럼에서도 “만약 리먼 브러더스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였다면 결코 금융위기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탄식이 터져나왔다. 금녀의 영역이라 할 만큼 남성 일색인 월스트리트 문화가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그래서 테스토스테론 분비량이 남성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한 여자더러 금융을 주무르게 하자는 대안이 떠올랐다. 간이 작아 큰 사고는 못 칠 거란 계산이다. 미국 오바마 정권이 금융감독 수장인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에 최초로 여성을 앉힌 게 대표적이다. 국가부도 사태에 빠진 아이슬란드도 국유화한 3대 은행 중 두 곳에 여성 행장을 소방수로 투입했다. 바야흐로 금융계에 한바탕 치맛바람이 휘몰아칠 참이다.

그렇다고 한 줌밖에 안 되는 여성 금융인들이 모든 자릴 꿰찰 순 없으니 남자들도 호르몬의 유혹과 싸워 이기는 법을 익혀야겠다. 원로의 훈수가 도움이 될 터다.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금융상품은 사지 말라. 자기가 사고 싶지 않은 상품은 남에게 팔지도 말라.” 지난해 ‘유로머니’가 최우수 은행으로 꼽은 방코 산탄데르(스페인)의 에밀리오 보탱 회장이 밝힌 위기 방지법이다. 하지만 그런 기본을 지키는 것조차 남자들한텐 쉽지 않다고 보는 모양이다. 4대째 은행업을 이어온 그도 자녀 여섯 중 딸 아나(산탄데르 투자부문 대표)를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찍었으니 말이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