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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티어著,'물의 역사' … 신화.풍습에 비춰진 물의 이미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장마철이다.

도처에 물이 넘친다.

다행스럽게 올해엔 이렇다할 수재 (水災)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사람들은 비를 두려워 한다.

혹시라도 홍수가 나는 것은 아닌지. 가뭄이 들면 목말라 하던 물도 우기 (雨期)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물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물은 생명과 죽음의 원인이다.

어떤 때는 상대를 강화시키고 영양분을 주지만 어떤 때는 생명을 박탈하고 빼앗는다.

이렇게 모든 사물은 물과 더불어 때가 되면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 창조와 파괴라는 물의 이중성을 주목한 말이다.

도서출판 예문에서 번역.출간된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의 '물의 역사' 는 이렇듯 문화.문명의 근원이 되는 물의 의미를 다각도로 짚은 흥미로운 책이다.

장마철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교양서로 손색이 없다.

평소 우리가 무심하게 스쳐보냈던 물의 문화적 속성을 들춰내기 때문. 책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의 신화.전설.종교.풍속.예술에 나타난 물의 이미지가 상세하고도 부담없이 펼쳐진다.

물의 풍속사요, 문화사요, 사회사인 셈. 얘기는 그리스.이집트.수메르.인도등 고대문명의 창조신화에서 시작된다.

물은 고대인들에게 생명의 근원. 자연히 창조신화에도 물은 '단골' 로 등장한다.

성경 창세기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는 구절이 나오고 설형문자를 발명한 수메르인들에도 물의 집합체인 바다는 자궁을 뜻했다.

그리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로마명 비너스) 도 아버지 우라노스의 잘려진 성기가 물거품으로 변하면서 탄생했다.

저자는 물의 이같은 신비적 속성을 드러내며 기우제등 각 문화권에서 발생한 물 숭배의식도 보여준다.

인간과 물이 본격적으로 만난 곳은 목욕탕. 목욕은 신체.죄.알몸.휴식등에 대한 각 문화권의 태도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청결함을 좋아했던 그리스인들은 토론을 벌이기 전 목욕을 했고, 로마인들은 공중목욕탕을 사교의 장소로 활용할 만큼 예술적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회교도들은 목욕을 명상과 깨달음의 통로로, 핀란드인들은 질병의 치료 수단으로 애용했다고. 개인의 관능적 쾌락을 강조하는 20세기의 거품목욕 광고도 분석한다.

이밖에 저자는 문학.음악.미술.건축등에 구현된 물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여성의 순결함과 성적 매력을 상징했던 샘과 물의 요정들이 20세기 미술에선 물대야와 매춘부로 타락했다는 부분에선 문명 비판적 성격을 띤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대인들이 물의 진미 (眞味) 를 상실했다는 점. 저자는 "현대인들이 마시는 물은 여러 차례의 정수과정과 화학처리를 거친 '죽은' 물" 이라고 단정한다.

환경오염등 현재 혼란에 빠진 서구문명도 결국 물의 죽음이 근인 (根因) 이라는 것. "물에 대한 책임감 있는 올바른 인식, 이것이 우리 생태계와 환경과 정신 가치의 근본이다" 고 설파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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