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밤샘수사'는 부끄러운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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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전 대법원은 '30시간 동안 피의자를 잠재우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낸 자백은 증거로 쓸 수 없다' 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이 갖는 의미는 실로 크다.

그동안 암묵적으로 용인돼온 '잠 안재우기 수사' 관행에 철퇴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결은 그 중요성에 비해 별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그랬는지, 아니면 이것보다 표피적 흥미에 있어 앞서는 사건들이 많아 그랬는지 그 속사정을 헤아릴 방도는 없다.

잠 안재우기 명백한 拷問 어쨌든 지난날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치고 '밤샘수사' 가 이뤄지지 않은 전례가 없던 걸로 미뤄 볼 때 검찰을 비롯한 수사기관들이 이 판결에 적잖이 곤혹스러워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는 ○○○씨에 대한 밤샘수사가 이뤄지고 있는 ○○검찰청사 현장입니다" 는 식의 방송 리포트가 우리 눈 앞에서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면 왜 밤샘수사가 지탄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조사하는 쪽에서는 밤샘 '수사' 지만 조사받는 입장에서는 잠 안재우기 '고문 (拷問)' 이기 때문이다.

수사관들은 "그만 빨리 끝내고 자자" 는 말로 피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한다.

잠을 재우지 않아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피의자는 자포자기에 빠져 그들의 요구대로 자백 아닌 자백을 해버리고 만다.

우리나라가 가입하고 있는 유엔 고문방지 조약 제1조는 고문이란 '공무원이나 공무수행자가… 고의 (故意) 로 개인에게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 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피의자를 잠 재우지 않는 행위가 이러한 정의규정에 그대로 부합한다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잠 안재우기' 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흔히 자행되던 물고문이나 전기고문과 비교할 때 생명에 직접적 위해를 주거나 생명을 잃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잠 안재우기' 는 보다 교묘한 형태의 세련된 (? ) 고문인 것이다.

지난 93년 인권선언일에 한국 등에서는 "고문이 은밀히 행해지고 있다 (Torture moves into shadows)" 고 한 국제앰네스티 피엘 사네 사무총장의 지적은 그래서 우리 현실에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또 이러한 '은밀성' 은 대한변호사협회가 매년 펴내고 있는 '인권보고서' 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매사에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하느냐' 를 가지고 근면과 열성의 척도로 삼아왔다.

그러다 보니 돌관 (突貫) 공사.철야작업.야근 (夜勤) 과 같은 물량적 사고방식은 언제나 긍정적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수사기관이라 해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D데이를 정해놓고 해결해야 하는 사회적 중요사건의 경우엔 밤낮 가리지 않고 수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분위기였다.

그래서 일각에선 수사의 집중도와 효율성이란 측면에서 밤샘 수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제도적 뒷받침 따라야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라. 수사에서의 효율성과 집중도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수사기관 종사자들이 능률을 위해 감내하는 '자발적 불면' 과 피의자의 '강요된 불면' 의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 크다.

한쪽엔 수사 실적 (? ) 이라는 유형의 결과물이 남지만 다른 쪽엔 인간적 자존 (自尊) 을 피폐케하는 무형의 폭력만이 남는다.

이제 밤샘수사는 더이상 자랑이 아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떨쳐버리려면 무엇보다 수사기관 종사자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제도적 뒷받침도 따라야 한다.

가령 피의자 신문조서 등을 작성할 때 조사 시작시간과 종료시간을 명기하고 피의자로부터 이를 확인받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수 있다.

또 야간의 특정 시점을 정해 그 이후엔 원칙적으로 수사를 금지한다는 규정을 관련 직무집행규정에 두고, 이를 어길 때엔 처벌한다는 조항을 마련할 필요도 있겠다. 박성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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