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18. 내가 만난 사마란치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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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앞줄 왼쪽부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한국의 날’에 참석한 필자, 사마란치, 레슬링 선수 심권호, 이건희 위원.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나의 올림픽 30년 인생은 사마란치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30년 이상 함께 지낸 그와의 인연은 깊고도 깊다. 1920년생이니까 나보다 11살 연상인데 서로 ‘형제(brother)’라고 부르는 사이다. 내가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2001년 모스크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는 자크 로게 편에 서는 바람에 나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지만 그가 올림픽 운동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75년 로마에서 열린 ANOC(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 총회에서 사마란치를 처음 봤다. 위압적이었지만 친밀감을 주는, 기묘한 인물이었다.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역시 서울 올림픽 유치활동을 할 때부터다. 서울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훌륭하게 치른 올림픽이지만 가장 많은 난제를 안고 치른 올림픽이기도 하다. 특히 경기 스케줄과 TV 방영권 문제가 난항이었다. 이때는 IOC에 조정위원회 같은 게 없어서 문제가 생기면 나와 IOC 관계관이 함께 처리하는 식이었다. 사마란치와 매일같이 전화로 상의하면서 가까와졌다.

나의 전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인 켈러 시절에는 세계 스포츠계의 리더 자리를 놓고 사마란치와 켈러가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러나 내가 GAISF 회장이 된 이후에는 IOC와 GAISF가 훌륭한 파트너로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겉으로 볼 때 사마란치는 조금 냉혹한 인상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에게 온화하며 정이 많은 사람이다. 항상 동료를 칭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스페인의 주소련 대사였던 사마란치는 80년 모스크바 총회에서 IOC 위원장이 됐다. 당시 IOC의 재정은 거의 빈사상태였다. 서방의 보이콧으로 모스크바 올림픽은 반쪽 대회가 됐다. 여러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됐고, IOC의 장래가 의심될 정도였다.

사마란치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계의 흐름을 먼저 읽었다. 올림픽에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구분을 없애고, 상업주의를 도입해 재정을 살렸다. 일부에선 올림픽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하지만 사마란치는 돈 없이 스포츠가 발전할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84년 LA 올림픽이 흑자 올림픽이 되자 각국의 올림픽 유치운동에 불이 붙었다. 올림픽 수익금을 국제경기단체와 각국의 선수육성기금으로 지원했다. 스포츠의 대중화와 세계화라는 IOC 100년의 숙제를 푼 것이다.

그의 공적 중 하나가 바로 서울 올림픽이다. 많은 한국 사람이 81년 바덴바덴에서 “세울 코리아”를 발표하던 사마란치를 기억하고 있다. 서울 올림픽은 우리뿐 아니라 IOC로서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동서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분단국가에서, 더구나 아시아의 소국에서 올림픽을 치른다는 것 자체가 의문투성이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저력과 사마란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어느 올림픽보다 훌륭하고 성공적인 대회가 될 수 있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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