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영혼의 박막(薄膜)이 떨리는 걸 느꼈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교통로가 열리는 순간,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순간…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그것을 위장없이 발설할 줄 아는 그녀의 태도에 놀라 나는 잠시 감동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러다가 문득,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그럼 우리 여길 빠져나가 자연스런 장소로 갈까요?” 그날밤,그녀와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한강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다.그리고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꽤나 다채로운 얘기를 주고받았다.자연스러움을 예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서로 다르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녀와 나의 공감대는 무궁무진하게 확장돼 나갔다.영화로 들어갔다가 소설로 옮겨가고,패션 디자인으로 너머갔다가 이윽고 인생으로까지 교감의 영역을 넓혀나간 것이었다.

“선생님과 저,오늘 처음 만난 게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온 사람들 같아요.참 이상하죠?” 발그레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 나는 결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그러자 결혼하고 싶은 남자를 만나지도 못했고,반드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서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간다고 그녀는 대답했다.부모님들도 이혼을 했기 때문에 결혼을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그래서 하루하루를 흐르는 강물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그리고 나,마흔이 되도록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물었다.

“나도 하영씨처럼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그냥 살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그렇게 되려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잖아요.더군다나 이제 난 마흔이 되었으니 이런 문제를 운명으로 받아들여도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아요.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죠 뭐.” 거짓말이 아니라 설명할 방도를 찾을 길이 없어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하지만 아무리 되새겨봐도 그것이 온당한 대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인생의 어느 순간이 특별하지 않고,인생의 어느 순간을 그러려니 하고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나는 끝없이 사랑을 꿈꾸고 갈망하는 자,그러면서도 마음에 묻어둔 사랑 때문에 또다른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사랑에 초연해지고 거미줄처럼 영혼을 덮어 오는 외로움을 물리칠 수 있었다면,그렇다면 지금 하영을 만나 또다른 기대감으로 영혼의 빗장을 열려 하는 나를 무슨 수로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