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한 황장엽씨 자유 80일 - 체중 늘고 서울구경도 즐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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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직접 보고 들은 한국의 현실은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으로 짧은 기간 역사의 기적을 창조해 놓은 남녘동포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10일 서울도착 80일만에 공식석상에 나타난 황장엽(黃長燁)씨는“우리 민족이 이뤄놓은 세기적 변혁을 하루빨리 북한 동포에게 보여줘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다.안가에 머무르고 있는 黃씨는 당국의 신문과 산업시찰등을 위한 외출 외엔 독서.글쓰기로 소일하고 있다.

“동화책을 좋아해 서울에 온 뒤 30권쯤 읽었다”는 그는“원래 조반(朝飯)을 안했는데 자꾸 먹으라고 해서 간략히 먹고 권하는 바람에 30분쯤 산책도 한다”고 자신의 최근 생활을 소개했다.

그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본 한 당국자는 운동복 차림으로 아침산책을 마친 후 곧바로 넥타이를 맨 단정한 차림으로 갈아입을 정도로 격식과 절도있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꼿꼿한 학자로서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도착 이후 곧바로 안정을 찾은 모습이며 습관대로 오전4시면 잠에서 깬다는 것이다.산책은 당초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관계당국이 건강에 좋다며 적극 권유했다.평소 안하던 아침식사를 꼬박꼬박 한 때문인지 입국당시보다 체중이 2㎏늘어 57㎏을 유지하고 있다.처음엔 텔레비전을 전혀 시청하지 않았지만 최근엔 남한 실상을 빨리 파악해야 겠다며 신문과 함께 TV도 즐겨본다.黃씨는 서울도착이후 나흘째인 4월23일 서울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호국영령들 앞에 사죄했다.용산전자상가.포항제철.현대자동차공장등 주요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잠실 롯데월드등 서울시내를 구경했다. 또 안기부와 통일.안보 관련 부처의 고위관계자,미중앙정보국(CIA)요원등과 만나 북한정세에 대해 진술했다. 특히 먼저 서울로 탈출해 와있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제자들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됐다.지난 5월 중순에는 안가 안에서 스승의 날에 즈음한 모임을 가졌다.현성일.최수봉씨 부부와 최세웅.신영희씨 부부,김일성대교수 출신 조명철씨를 만나 2시간가량 점심을 나눴다.

黃씨는“평양에서는 내가 스승이지만 서울 생활에선 내가 후배”라고 말해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회견에서 黃씨는 북에 두고 온 가족문제가 거론되자“가슴이 미어지는 것같고 정신이 흐려진다.제일 가까운 사람을 배반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오다보니 그 죄가 얼마나 큰지…”라고 말을 잊지 못했다.黃씨는 이어“이를 보상할 정도로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고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면서도“개인의 생명보다 가족의 생명이 중요하지만 민족의 생명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黃씨는 망명 직후인 2월17일 주중(駐中)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74회 생일파티를 준비하려할 때도“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고통받고 있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黃씨가 북에 두고 온 가족은 박승옥(65)씨와 1남3녀. 이영종 기자

<사진설명>

황장엽씨 기자회견이 전국에 생중계된 10일 서울역 대합실의 시민들이 TV 앞에 모여 회견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오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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