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경진의 서핑차이나] 중국의 인간 ‘진품명품’ 왕스샹(王世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TV쇼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집안에 꼭꼭 숨겨둔 가보나, 고미술품의 진품 여부를 감정해 주고 가격을 산정해주는 프로다.
중국에도 ‘진품명품’이 있다. CC-TV 2채널에 방영중인 ‘젠바오(鑒寶)’라는 프로그램이다.
뿐만 아니다. 중국에는 인간 ‘진품명품’이 한 명 살아있다.

‘살아있는 국보’, ‘베이징 제일의 문물 수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왕스샹(王世襄ㆍ95)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1914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푸졘(福建)성 푸저우(福州)다. 아버지는 외교부 조약과에서 근무했다. 어머니는 중국 화단(畵壇)의 재원이었다. 어려서부터 전통 교육과 서구식 교육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온 뒤 최고의 옛 한어 선생님을 모셔 경학(經學), 사학(史學), 소학(小學), 음운(音韵) 등을 배웠으나 진전이 없었다. 오직 옛 시사(詩詞)만 좋아했다. 역사조차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는 회상한다. 음풍농월을 좋아하는 ‘공자(公子)’기질이 어려서부터 다분했던 것이다.

그는 소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베이핑(北平, 지금의 베이징)에 있는 미국학교에서 마쳤다. 그는 영어를 잘했지만 중국 민속과 문화에 푹 빠졌다.

어릴 때 그의 장난감은 각양각색이었다. 베짱이, 귀뚜라미, 비둘기, 매를 키우는가 하면 대나무 조각(竹刻), 칠기, 명나라 가구 등에 파묻혀 살았다.

그가 연경(燕京)대학에 다니던 시절 어깨에 매를 앉히고, 품 안에는 여치를 넣고 학교 교정을 거닐곤 했다. 엄한 교수의 강의 시간에 소매 속 여치가 울자 교실 밖으로 쫓겨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38년 학부를 마치자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생활이 변했다. 진지하게 학업에 임했다. 41년 ‘중국화론연구(中國畵論硏究)-선진시대에서 송까지’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43년에는 학위 논문에 이어 원대부터 청대에 이르는 속편을 완성했다. 그 해 왕스샹은 아버지까지 여의였다. 베이핑을 떠나 서남연합대학으로 향했다.

충칭에서 당시 고궁박물원 원장이자 금석문과 고고학의 대가 마헝(馬衡·1881~1955)을 만난다. 마헝은 그에게 고궁박물원의 비서직 자리를 줬다. 그곳에서 왕스샹은 양계초(梁啓超)의 아들이자 중국 건축의 대가 양쓰청(梁思成·1901~1972)과 유명한 역사가이자 문학가 푸스녠(傅斯年·1896~1950)과 교분을 쌓았다.

1946년, 왕스샹은 베이징 고궁박물원에서 전쟁의 참화를 겪은 문물들을 정리했다. 그 해 말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약탈 문화재 반환 작업에도 참여했다. 48년부터 1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박물관을 둘러봤다.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 피츠버그 대학에서 그를 붙잡았으나 거절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고궁박물원에서 일했다. 1953년부터는 민족음악연구소에서 일하며 중국고대음악사 진열실을 꾸미고 관련 책도 썼다. 61년에는 중앙공예미술학원에서 중국 가구에 대한 강의를 맡았다.

1981년 그의 대표작 『명나라식 가구 감상(明式家具珍賞)』이 나왔다. 이어 85년에는 『명나라식 가구 연구(明式家具硏究)』를 펴냈다. 문화대혁명 동란 속에서 명대 가구들을 하나하나 정리한 역작이다. 수백 장의 사진을 곁들인 앞의 책은 영국, 미국 등 9개 언어로 번역됐다. 국제적으로 호사가들 사이에 명나라 가구 소장 붐을 일으켰다.

왕스샹은 기인(奇人)이다. 비둘기를 무척 사랑한다. 중국 전통의 비둘기 키우기는 그의 가장 큰 낙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던 날 냐오차오에는 비둘기가 유독 많았다. 후진타오 주석의 개회 선언과 함께 진짜 비둘기가 날았고, 비둘기 옷을 입은 공연자들이 ‘비둘기 인간 냐오차오’를 만들기도 했다. 커다란 비둘기 형상 매스게임도 연출됐다. 중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개막식에 중국 전통의 비둘기를 선보여야 한다고 일찌감치 주장하던 그였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보고 싶다던 왕스샹 말년의 꿈을 위해 장이머우가 특별히 배려한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날 밤 냐오차오엔 비둘기가 많았다.

그는 요리사이자 미식가다. 먹는 것에 관한 한 그는 잘 먹고, 잘 만들고, 품평도 잘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엌에 들어가 요리하길 즐겼다. 어린 시절 그의 집 주방에는 전국 각지에서 뽑힌 유명 요리사가 있었고 왕스샹은 그들에게 요리 기술을 사사받았다. 왕스샹은 전국요리 명인 기술대회의 특별 고문을 역임했다.

왕스샹은 애처가였다. 그의 부인 위안취안(袁荃) 역시 보통 여인네가 아니었다. 중국 전통 고금(古琴, 일곱 줄의 거문고)의 국수(國手)에게 직접 사사받은 거문고의 대가였다. 자칭 ‘금노(琴奴)’라 칭했다. 60여 년의 결혼생활은 2003년 가을에 끝났다.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낙담한 왕스샹은 부인의 거문고, 불상, 가구 등 143점을 경매에 붙였다. 총 6300여 만 위안(13억원)에 팔렸다.

경매를 마치고 왕스샹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장가가 아니다. 소장가가 되려면 중요한 조건이 있다. 돈이 있어야 한다. 나에겐 고급 칠기도, 서예작품이나 청동기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물건들은 아주 비싸다. 나는 이런 물건들을 가져본 적이 없다. 때문에 내가 소장한 물건들은 진정한 소장가들에게 장난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2003년 12월3일 네덜란드 왕실의 요한 프리소 왕자가 중국 베이징을 찾았다. 2003년 ‘클라우스 왕자 최고 영예상(Prince Claus Prize)’을 수여하기 위해서였다. 왕스샹이 문화방면에 남긴 연구 성과와 그가 아니었으면 사라졌을 중국의 문화를 높이 산 것이다. 부상은 현금 10만 유로(약 2억원)였다. 왕스샹은 받은 상금을 모두 벽지 어린이 교육 장려 운동인 ‘희망공정’에 기부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