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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金 희생 모른 체 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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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로버트 김은 지난 5일 모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아내 장명희씨를 현관에서 전송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로버트 김이 교도소에서 집으로 거처를 옮겨 출소할 때까지 생활하는 가택연금이 시작되면서 이 사건이 일단락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로버트 김 부부는 현재 어떤 미래도 보장받지 못한 채 후원회에서 다달이 보내는 약간의 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로버트 김이 치른 엄청난 희생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이나 지원도 받지 못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많은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8년 동안 로버트 김 후원은 사면과 보호 관찰 축소에 집중됐다. 물론 이 부분이 중요하고 반드시 해결돼야 하지만 일개 민간단체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구명활동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또한 사건의 본질이 정치적인 논리로 흐르면서 정작 로버트 김과 그 가족이 처한 어려움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후원회가 출범한 뒤 1년 동안 4000~5000여명의 사람이 성금을 보내왔다. 사무실로 찾아와 직접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고, 로버트 김이 편하도록 달러로 바꿔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눈물겨운 정성에도 생계 대책, 거주지 마련 등 로버트 김의 경제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후원회의 세(勢)를 키워 대대적인 활동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반미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로버트 김의 요청으로 입소문에 의지해 뜻을 모아왔다. 그러다 보니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없는 한 어떤 돌파구도 찾기 힘들다.

이 밖에도 현실적인 장벽은 높다. 기부금 모금 허가와 ARS 서비스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법과 제도의 장벽에 부닥쳐 좌절감에 빠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기부금 모금 허가의 경우 별도의 신청서류가 없어 담당 부처에 수십번 이상 문의해 서류를 제출, 가까스로 허가를 받아냈다. 임의단체인 후원회에 허가를 내줬다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빚지 않을까 우려하는 공무원의 태도에서 약소국의 현실을 절감했다.

700 ARS 서비스는 누구나 전화로 모금에 참여할 수 있어 후원회 입장에서는 허가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현재로선 허가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이를 허가받으려면 기부금 허가 외에 비영리 법인 인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법인 설립의 첫째 조건이 '불특정 다수를 돕는 공익사업'이어서 로버트 김이란 특정 개인을 돕는 후원회는 도저히 자격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 한계를 호소하면 담당 부처의 한결 같은 대답은 "현행법상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특별법 제정 등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로버트 김 문제는 현 단계에서 멈춰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대통령, 또는 행정자치부.외교통상부 등 관계부처 장관의 강한 해결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원회는 지난 2일 거리로 나가 시민을 상대로 가두모금을 시작했다. 모금 목표는 로버트 김의 거주지 마련이다. 하지만 한가닥 희망을 안고 시작한 가두모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은 대부분 백화점 등 사유지라서 영업 방해 등을 이유로 모금 장소로 허락해주지 않고, 시장 등은 노점상들의 권익 문제가 있어 역시 어렵다.

정부는 지금까지처럼 대미관계가 어떻고, 로버트 김이 미국시민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입장 표명을 미뤄 온 소극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이웅진 로버트 김 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