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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만드는 공룡 ‘초고층 뉴딜’의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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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04면

초고층 빌딩 건설과 경제위기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도이체방크 애널리스트인 앤드루 로런스는 1999년 보고서에서 “지난 100년 동안 몇 차례 심각한 경제위기가 있었는데 모두 세계 1위의 초고층 빌딩이 세워진 뒤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대공황 때인 29년과 30년 크라이슬러빌딩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뉴욕에 잇따라 들어섰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시카고 시어스타워 역시 스태그플레이션을 겪던 70년대 문을 열었다.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타워(97년)는 아시아 경제위기 와중에 완공됐다. 초고층은 빚과 탐욕으로 빚은 바벨탑일까. 블룸버그의 경제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가장 높은 빌딩을 가지려는 열망은 기술적 혁신보다는 갑작스러운 자본 유입과 관련이 깊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한강 스카이라인 바꿀 600m급 빌딩들

두바이가 초고층을 뽐낼 때도 어김없이 글로벌 위기가 찾아왔다. 지난해는 초고층 건물사에서 최고의 해였다. 1년간 완공된 세계 10대 초고층 건물은 평균 319m다. 10년 전보다 31m 높아졌다. 올해는 버즈두바이(800m 이상)의 완공으로 더 높아질 전망이다. 경기가 좋을 때 착공돼 경기가 나빠질 때쯤 완공된다는 초고층 사이클 이론이 딱 들어맞은 것일까. <그래프 참조> 반면 공사 초기나 설계 단계인 초고층은 상당수가 일단 멈춤에 들어갔다. 두바이 국영기업인 나킬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세계 최고층 ‘나킬 하버앤타워’ 기초공사를 1년간 중단한다고 지난달 14일 밝혔다.

이명박 정부의 노다지 관광상품
한국에서도 부동산 호황기를 보내며 초고층 밑그림이 쏟아졌다.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의 첨단산업단지 안에 100층 이상의 규모로 외국 기업 전용 빌딩인 ‘인터내셔널비즈니스센터(IBC)’를 짓겠다. 이르면 2003년 중 착공할 수 있다.”

2002년 2월 당시 손병석 외국기업협회장의 말이다. 지난 10년간 100층 이상의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은 서울·인천·일산·부산 등지에서 심심찮게 나왔다. 청사진대로라면 서울과 부산에는 지금 초고층이 최소한 4~5개쯤 솟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착공은 한 건도 없었다. 중동 두바이와 중국 상하이에서 초고층이 쑥쑥 올라갈 때 한국은 63빌딩과 타워팰리스에 안주했다. 김종수 초고층건축포럼(SCF) 회장은 “자본과 기술, 수요가 충분한데도 초고층을 세우지 못한 것은 부실한 제도와 각종 규제, 특혜라며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국민 정서 등 이른바 한국병 때문”이라고 말했다. 집값이 치솟던 2005년 강남 압구정동과 청담동 주민들이 삼성동 아이파크(46층)를 모델 삼아 60층 규모의 초고층 재건축을 추진하려 했을 때다. 정부는 항공기 안전 등 10여 가지 이유를 대며 주민 요구를 잠재웠다.

잠자던 초고층 신축 계획을 살려 낸 것은 글로벌 위기로 찾아온 불황이다. ‘초고층 뉴딜’이라는 그럴듯한 명분까지 붙었다. 서울시는 한강변의 초고층 아파트 신축을 허용하는 등 각종 규제를 풀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초고층은 4대 강, 경인운하와 함께 관광산업의 노다지로 여겨지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터라 특혜 시비마저 줄었다. 한국의 초고층은 불황기에 착공되고 호황기에 완공될 전망이다.

가장 진척이 빠른 곳은 부산의 롯데월드다. 3월 말 착공할 예정이다. 상암동 랜드마크 빌딩은 3월 말 토지 계약, 1년간의 설계를 거쳐 내년 초 착공할 예정이다. 서울 잠실의 제2롯데월드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으나 정부가 서울공항의 활주로를 변경해서라도 허용하겠다고 해 사업 추진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매립지에 세워질 인천타워는 이르면 3월 기초 파일 공사가 시작된다. 부산월드비즈니스센터(WBCB)는 지난해 2월 사업 허가를 받아 놓았다. 설계 변경을 거쳐 늦어도 내년 6월 말까지 착공할 계획이다.

서울과 인천, 불붙은 최고층 경쟁
초고층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1890년대 초고층은 10층 건물이었다. 100층이 넘는 건물이 등장하는 현대에는 국제고층건물학회(CTBUH)에서 발표하는 세계 100대 빌딩(50층) 수준의 건물을 의미한다. 국내에서는 층수로 50층 이상이거나 높이로 200m 이상인 건축물로 정의돼 있다.

국내 최초의 초고층은 여의도 63빌딩이다. 지상 60층, 지하 3층 규모 63빌딩의 높이는 249m다. ‘대한생명 63빌딩’이라는 이름으로 80년 2월 착공해 85년 5월 완공됐다. 완공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10년 넘게 63빌딩은 국내 최고층 건물의 자리를 지켰다. 90년 후반 아크로빌(46층), 타워팰리스I(66층)·Ⅱ(55층)·Ⅲ(69층), 삼성동 아이파크(46층), 부산센텀파크(53층) 등이 지어졌다.

100층 이상의 초고층 계획은 50~60층 건물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서울·인천·부산에서 경쟁적으로 나왔다. 초고층 레이스는 100층 이상 초고층의 ‘최초’와 ‘최고’ 다툼이다. 부산롯데월드는 종전 107층에서 120층으로, 부산월드비즈니스센터는 108층에서 123층으로 설계 변경을 추진 중이다. 117층 계획으로 유명한 해운대관광리조트는 부지를 5만10㎡에서 6만5934㎡로 넓힌 뒤 건축 계획을 가다듬고 있다. 부산도시공사 양현태 건축사업팀장은 “올해 8~9월에 부지 조성에 착수하고 내년에는 건축 착공이 가능하다”며 “해운대라는 입지 면에서 다른 초고층보다 사업성이 있다”고 말했다.

수도권에서는 서울 용산드림타워와 인천타워가 경쟁하고 있다. 둘다 높이가 600m를 넘는다. 박장규 용산구청장은 2년 전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용산 랜드마크 건물을 인천타워(601m)보다 10m 또는 5m라도 높여 1등이 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고에 집착하는 것은 관광객 유치 효과나 상징성에서 유리해서다.

초고층은 비싸다. 초고층 시공비는 60층 1개 동이 30층 2개 동의 1.3~1.4배, 100층 1개 동이 50층 2개 동의 1.7배에 달한다(한양대 신성우 교수). 고층화할수록 단위 건축비가 크게 증가한다. 기술적으로 1㎞ 높이의 초고층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경제성이 문제다. 비싼 임대료를 내고 버틸 수 있는 고소득자나 수익성 높은 사업체만 입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롯데그룹은 최소 1조7000억원을 들여 112층 규모의 제2롯데월드를 지을 경우 공사 기간 중 연 250여만 명의 고용 효과를, 완공 후에는 2만3000명의 고용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초고층은 자체가 관광상품이다. 초고층 주변에 관련 부대시설이 들어서면 지역경제도 큰 영향을 받는다. 100층 업무빌딩은 1만 명의 상시 근무자와 5만 명 정도의 유동 인구를 발생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아파트가 처음 등장할 때처럼 아직 초고층을 기피하거나 깎아내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손발 저림 등 ‘고층아파트 증후군’도 보고되고 있다. 풍수지리 전문가들도 초고층에 비판적이다. 김종수 회장은 “초고층의 나쁜 점들이 과장돼 있으나 80층 정도까지는 거주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게 해외에서 입증됐다”고 말했다. 초고층의 장점은 시원한 조망(view), 넓은 공원 등 수두룩하다.

방재 방안 놓고 부처 간 티격태격
초고층 건축물은 일반 건축물보다 화재 등 재난에 취약하다. 대피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에 따라 초고층 건물에는 일반 건축물과 다른 건축 규정이 적용된다. 서울시에 따르면 초고층은 일반 건축물과 달리 ▶바닥 면적에 포함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25~30층마다 ‘중간 대피층’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고 ▶배연창을 열 수 없으므로 꼭 배연창을 만들지 않아도 되지만 ▶피난 전용 승강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또 건물이 크므로 주거·업무 등 복합 용도가 가능하며 주차장 기준도 완화된다.

하지만 소방방재청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다. 소방방재청은 화재 시 옥상을 통해 피난자를 구출해야 한다며 헬리포트(헬리콥터 이착륙장) 설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헬리포트는 종전 11층 이상의 1만㎡ 이상 건축물에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했으나 96년부터 평지붕일 때만 의무화했다. 국토해양부는 최근 ‘건축물의 입면과 옥상 디자인의 제한으로 도시 경관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헬리포트 설치를 건축주에게 일임하는 내용의 건축법시행령을 입법 예고했다. 이에 대해 소방방재청이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아 국토부는 이번 개정안에서 이 부분을 뺐다. 국토부와 소방방재청이 아파트 발코니 확장을 둘러싸고 몇 년 전 벌인 방재 논쟁을 연상시킨다.

황태윤(연세대 상경계열1) 인턴기자가 기사 작성을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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