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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돌이 떡이 되어 너를 섬길 때 진실로 너는 영적이 되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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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33면

내가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안티옥 산 중턱의 석굴이 바로 초대 교인들의 주거지인 동시에 교회였고 수행 동굴이었고 무덤이었다. 이 동굴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바로 안티옥 전경이다. 도시 뒤로 뿌옇게 보이는 산이 타우루스(Taurus) 산맥의 줄기이고 도시 한복판으로 오론테스(Orontes) 강이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티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티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유래된 곳인데, 이곳에서 비로소 비유대인인 헬라인에게도 그리스도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안티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국제도시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독주가 허용될 수 없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외부인들이 예수 신앙인들을 비하시키는 명칭이었을 것이다. 임진권 기자

제19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자여, 복되도다. 2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3 왜냐하면 너희를 위하여 파라다이스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준비되어 있나니, 그 나무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변하지도 아니하며, 그 잎사귀는 떨어지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 4 그 나무를 아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92. 존재와 존재-전(前)-존재

1 Jesus said, “Blessed is the one who came into being before coming into being. 2 If you become my disciples and listen to my words, these stones will minister to you. 3 For there are five trees in Paradise for you; they do not change, summer or winter, and their leaves do not fall. 4 Whoever knows them will not taste death.”

1930년대 발굴을 통해 드러난 안티옥 지역의 모자이크. 소테리아(soteria·salvation)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이 여인이야말로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원의 여신일 것이다. 기독교 이전의 헬라인들의 구세주관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놓고(偏袒右肩·싯달타의 습관) 월계관을 쓰고 화려한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의 모습은 헬레니즘 시대의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마복음이 일시에 한 사람에 의하여 집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로기온 자료들도 다양한 전승의 예수 말씀들이 누군가에 의하여 수집된 결과물일 것이다. 그 수집 과정이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수집의 주체가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도마복음의 내용들은 최소한 마가복음에 선행하는 것으로, 복음서라는 드라마적 양식을 규정짓고 있는 사상적 틀에 오염되지 않은 어떤 오리지널한 예수 운동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사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가 도마복음을 복음서로서 이름 짓는 것은 원 텍스트의 말미에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기 때문인데, 도마복음의 복음의 의미와 공관복음서의 복음의 의미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다른 함의를 지닐 수 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good news)”이다. 마 11:5에는 종말에 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며, 눅 16:16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기쁜 소식은 종말론이나 기독론적 함의를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이 신화적 담론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도마복음은 결코 영지주의적 담론의 소산으로 보기 어렵다. 영지주의라는 것 자체가 일괄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대부분 유치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그러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기보다는 매우 견고한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장의 성격은 그러한 방식으로 도마를 규정하는 상식적 담론의 틀을 깨버린다. 도마도 역시 중층적으로 담론의 틀들이 엇갈려 있는 것이다.

이 안티옥 외곽 동굴교회의 전면은 12~13세기 십자군 시기의 작품이지만 그 내부의 석굴은 사도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의 본부였다. 베드로도 여기에서 한때 머물렀다. 이 석굴교회야말로 이방 기독교의 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성지이다.

우선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세속적·현상적 존재와, 그 세속적 존재 이전의 존재, 즉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자(a pre-existent existence)”라는 어떤 신화적 존재의 이원적 틀이 본 장의 담론에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상의 전후를 말하는 존재의 하이어라키에 그치지 않는다. 요한복음 1장에 깔려 있는 로고스기독론의 틀을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든가 요 9:58의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와 같은 언어에 깔려 있는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영지주의가 깔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고전 15:44~49에는 바울이 이러한 세계관을, 희랍적 영육 이원론의 틀 속에서 철저히 부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사용하고 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첫 사람 아담은 육의 인간이며 땅의 사람이고, 마지막 아담, 즉 부활한 인간은 영의 인간이며 하늘의 사람이다. 도마의 존재-전-존재는 바울의 마지막 아담과 상통한다. 요한은 로고스를 예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지만 도마는 그러한 가능성을 모든 인간에게 허용한다. 그래서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자들이야말로 복되도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로고스적 가능성을 소유한 인간이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내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제1장에서 말한 바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진지한 과정이다. 인간과 돌 사이에는 또다시 존재의 하이어라키가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도마는 암암리에 인간의 차원과 돌의 차원을 대적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큐 자료에 속하는 마 3:9(눅 3:8)에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이 있고, 예수의 광야 시험 장면에서도 사탄은 예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한다(마 4:3, 눅 4:3). 마 7:9에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는가”라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 돌과 떡을 대비시키며, 또 영에 대하여 육의 욕구인 떡을 비하시키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돌이야말로 떡이라고 하는 생명의 일체감을 암시하고 있다. 돌과 같은 존재조차도 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불가결의 것이다. 사람은 광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돌과 같은 저차원의 물질과도 생명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파라다이스의 다섯 그루 나무라는 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창 2:9에는 “야훼 하나님께서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에덴의 땅에 돋아나게 하셨다”는 표현이 있다. “파라다이스”라는 표현은 원래 페르시아말로서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 페르시아말이 셉츄아진트 번역자들을 통하여 에덴의 동산을 가리키는 말로서 유대문화권에 들어왔다. 신약에서는 지상의 정원이 아닌, 지상의 모든 죄악이 말소된 새로운 차원의 낙원을 의미한다. 예수는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있으리라”고 말한다(눅 23:43). 묵시문학에서는 파라다이스의 상실은 인간의 체험 속에서의 신의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며 구원을 파라다이스의 복원으로 생각한다. 실낙원(失樂園)과 복낙원(復樂園)이라는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본 장의 “파라다이스 다섯 그루의 나무”를 인간의 오관(五官·five senses)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색·성·향·미·촉에 상응하는 오관이 세속적 죄악에 물들지 않는 상태를 “계절에 따라 변하지도 않으며 그 잎사귀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 불멸성·불변성을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고 다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멸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맛본다고 하는 삶의 행위 속에 죽음의 요소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장, 18장, 19장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을 마지막에 공유함으로써 그 상관성을 과시하고 있다. 관련된 표현이 요 8:52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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